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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6-0401(Print)
ISSN : 2383-6334(Online)
The Research Journal of the Costume Culture Vol.22 No.5 pp.670-687
DOI : https://doi.org/10.7741/rjcc.2014.22.5.670

A study on the case of wearing Jungchimak and its form in the Joseon Dynasty

Jong-Suk Keum †
Dept. of Traditional Arts and Crafts,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Cultural Heritage, Korea
Corresponding Author : keumjsuk@hanmail.net
September 10, 2014 October 15, 2014 October 17, 2014

Abstract

This study focused on Jungchimak (coats with side slits) which was typically worn by men in the mid and late Joseon Dynasty. It was done research by examining the case of wearing Jungchimak centering on literature and paintings and analyzing its changes in terms of its form based on the relics that have been found in order to suggest the standard for the evaluation of the period of Jungchimak.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men who wore Jungchimak were the king, crown prince and Aristocratic under the official uniform or other robes or as ordinary clothes and shroud. Second, Jungchimak for king was mostly made of Dan (satin damask) and mostly jade green & navy in color, and it commonly used dragon pattern, cloud and treasure pattern, or grape pattern. The fabric used to make Jungchimak for crown prince was Dan & Ju (coarse-finished silk) and puple, green, jade green & navy in color. The fabric used to make Jungchimak for Aristocratic was Ju and indigo or white in color. Third, 251 relics have been announced until now. Most of them were made of silk fabric and had cloud and flower patterns. Fourth, Jungchimak showed changes through time in terms of collar and sleeve shapes, the ratio of armhole to sleeve opening, Geotseop (panel sewn on front opening for overlapping), Dang and Mu (side panel), the ratio of the total length of outer collar to the length of side slits, and the ratio of chest size to the width of lower end.


조선시대 중치막(中致莫)의 착용례와 형태 연구

금 종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초록


    I.Introduction

    중치막은 조선시대 중․후기에 남자들이 대표적 으로 많이 착용한 포로써, 받침옷이나 평소에 겉옷 으로 입었던 옷이다. 형태에 관해서는 무가 없고, 뒤는 막혀 있으며, 옆은 완전히 터져 세 자락이고, 광수의 포로 정의되어 왔다(You & Kim, 2000). 그 러나 출토복식이 많이 발굴되면서 무가 있음이 밝 혀져 형태에 관한 정의는 수정되었다 (Ahn & Cho, 2001).따라서 일반적으로 곧은 깃에, 소매가 넓고, 양옆으 로 트임이 있는 세 자락의 포로 정의할 수 있다.

    중치막의 착용 시기에 대해서 문헌에는 임진왜 란 이전부터 보이나, 유물로는 대부분 임진왜란 이 후에 나타난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최진 일가 묘에서 중치 막이 출토되어 중치막의 착용시기가 문헌과 일치 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으며(Lee, Ha, & Ahn, 2007), 16세기 중치막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치막과 관련된 연구를 살펴보면 Yun (1982)은 창의류 안에 창의․소창의․중치막․학 창의로 구분하여 총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Park(2002) 은 해평윤씨 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전반적으로 연 구하면서 중치막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Lee, Ha, and Ahn(2007)은 최진 유물을 분석하면서 그 중에 서 처음 발굴된 16세기 중치막을 부분적으로 연구 하였다. Hong(2008)도 남자 편복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면서 그 가운데 중치막을 다루고 있다. 이렇 듯 중치막에 관한 연구는 단독연구보다는 종합연 구의 일부분으로 연구되어 왔으며, 유물의 수량이 철릭 다음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유물 의 형태에 관한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문헌과 회화를 조사하고, 2014 년 8월 현재까지 발간된 보고서와 논문을 바탕으로 중치막의 착용례와 시대별 형태 변화를 연구하고 자 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과 회화를 중심으로 중치막의 착용 계층과 용도를 알아본다. 둘째, 신분별로 중치막에 사용한 직물과 색상을 분 석한다. 셋째, 지금까지 발표된 중치막 유물을 전체 적으로 조사하여 기초자료를 제시한다. 넷째, 조사 된 유물을 근거로 시대에 따른 형태를 분석하여 어 떠한 양식적 차이가 나타나는가를 살펴본다. 이는 중치막의 시대 감정을 위한 기준이 되는 자료로 활 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의 제한점은 보고서와 논문을 기준으로 하고, 모든 유물을 직접 조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다. 따라서 추후 연구 성과에 의해 수정될 수 있음 을 밝힌다.

    II.The Case of Wearing Jungchimak in Literature

    조선시대 문헌에 중치막은 ‘中赤莫’, ‘中致莫’, ‘듕 치막’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처음으로 기 록되어 있는 것은 16세기 중엽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 중 1553년 1월 30일 일기이 다(Lee, Ha, & Ahn, 2007).

    본 장에서는 조선시대 문헌 가운데 중치막이 기 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 원일기(承政院日記)」, 역대(歷代) 「빈전도감의궤(殯 殿都監儀軌)」․「빈전혼전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 軌)」․「빈궁혼궁도감의궤(殯宮魂宮都監儀軌)」, 「묵 재일기(黙齋日記)」, 「쇄미록(瑣尾錄)」, 「순천김씨언 간」, 「현풍곽씨언간」, 「홍재전서(弘齋全書)」, 「상례 언해(喪禮諺解)」, 「사례편람(四禮便覽)」, 「광례람(廣 禮覽)」, 「숙재집(肅齋集)」을 중심으로 중치막의 용 도를 살펴보고자 하며, 신분에 따라 왕(王), 왕세자 (王世子), 사대부(士大夫)로 나누었다.

    1.King

    왕의 중치막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 후 「실록」으로 표기한다), 「승정원일기」, 「빈전도 감의궤」․「빈전혼전도감의궤」 삼방의궤 에서 보 이며, 습(襲)․소렴(小斂)․대렴(大斂)․재궁의대(梓 宮衣襨)에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치막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왕 의 습의(襲衣)에 어떠한 의복들이 착용되었는지 「세 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 ,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실 록」, 「승정원일기」, 「빈전도감의궤」과 「빈전혼전도 감의궤」의 의주부분에서 살펴보면 <Table 1>과 같다.

    왕의 습의는 「세종실록」 오례의 에서 「국조오 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이르기까지 곤룡포-답 호-철릭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 경 종대의 습의를 보면 곤룡포-답호-장의(障衣)-중의(중 치막)로 되어 있어 중치막의 기록이 확인된다. 또 한 「실록」에서도 영조대에는 곤룡포-답호-장의-중 치막-단삼, 정조대에는 곤룡포-답호-중치막-장의-주 의-단삼으로 되어 있다. 두 문헌에서 장의와 중치 막의 순서가 바뀌기는 하였으나, 기존의 철릭을 대 신하여 중치막과 장의로 대체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후기 복식의 착용변화를 반영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철릭의사용빈도가 높아 출토유물도 많은가하면, 조선후기 에는 현저하게 수량이 줄어든다. 따라서 많이 착용 하는 중치막이 습의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의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남자 장의의 출토유물은 16세기 후반 이후에 보이지 않은데, 반면 영조와 정조대의 기록에는 많 이 보이고 있다. 이때의 장의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포로 볼 건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한 연구는 추후과제로 남긴다. 「빈전도감의 궤」과 「빈전혼전도감의궤」에서는 곤룡포-답호-철릭 으로 되어 있다.

    이 때 문헌의 내용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경 종대에 「승정원일기」에서는 곤룡포-답호-장의(障衣)- 중의(중치막)로 되어 있으나, 「빈전도감의궤」 의주 에서는 곤룡포-답호-철릭으로 되어 있다. 영조대에 는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곤룡포-답호-장의-중치막이나, 「빈전혼전도감의궤」 의주에서는 곤룡포 -답호-철릭으로 되어 있다. 정조대에 「실록」과 「승 정원일기」에서는 곤룡포-답호-중치막-장의이나 「빈 전혼전도감의궤」 의주에서는 곤룡포-답호-철릭으로 되어 있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는 「빈전도감의궤」 이나 「빈전혼전도감의궤」는 전대의 기록을 그대로 형식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다른 문헌 기록과 차이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Table 2>는 세부적으로 중치막을 왕대별로 정리 한 것이다.

    숙종대에는 「승정원일기」 대렴부분에 자적대단 의 중치막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承政院日記」, 肅 宗46年6月12日).

    경종대에는 「승정원일기」 습과 재궁의대에 기록 이 있다. 습에는 ‘자적보라초록유록중의(紫的寶羅草 綠楡綠中衣)’라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중치막(中 赤莫)’이라 일컽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재궁의대에 는 71점의 중치막이 기록되어 있다. 옥색은 21점(대 단4, 개기주, 능, 화사주, 방사주6, 용문단, 무문단2, 유문단, 화방주4), 남색은 20점(능, 개기주2, 방사주 12, 화방주2, 화방사, 운문단, 궁초), 초록색은 13점 (개기주, 운문대단, 대단8, 방사주3), 송화색은 7점 (포도문대단, 능, 상사단, 대단2, 화사주, 직물명 없 음), 자적색은 2점(화방주, 능), 다홍색은 2점(송금 단, 개기), 주황색은 2점(대단, 직물명 없음), 보라색 은 2점(대단, 용문단), 석염색은 1점(희문광직), 나 머지 궁초 1점이 있다(」承政院日記」, 景宗4年8月25 日, 8月29日).

    영조대에는 「실록」에 습․소렴․재궁의대의 기 록이 있다. 습에 사용된 중치막은 4점이며, 직물(織 物)은 운문류청대단(雲紋柳靑大緞), 남공단(藍貢緞), 자적향직(紫的鄕織), 초록공단(草綠貢緞)이다. 소렴 에는 17점을 사용하였으며, 옥색은 3점(광직2, 유문 단), 초록색은 4점(광직3, 유문향직), 두록색은 2점 (유문단), 자적색은 2점(광직, 향직), 남색은 2점(공 단), 연한남색은 2점(공단), 보라색은 2점(유문단, 유문능)이다. 재궁의대에는 36점을 사용하였으며, 옥 색은 12점(공단2, 광직3, 향직, 무문능, 능2, 사초2, 화화주), 초록색은 9점(공단3, 광직5, 유문단), 유록 색은 1점(능), 자적색은 4점(향직2, 공단, 유문향직), 남색은 10점(공단2, 광직3, 유문단, 능, 사초2, 화화 주) 등이다(「英祖實錄」, 127卷52年3月5日, 3月6日, 3月9日). 「승정원일기」에도 습․소렴․재궁의대의 기록이 있는데, 「실록」과 일치한다(「承政院日記」, 英 祖52年3月5日, 3月6日, 3月9日).

    정조대에는 「실록」에 습․소렴․대렴․재궁의대 의 기록이 있다. 습에 사용된 중치막은 2점이며, 남 화한단(藍禾漢緞)과 초록화한단(草綠禾漢緞)이다. 소 렴에도 2점을 사용하였는데, 초록공단(草綠貢緞)과 옥색능(玉色綾)이다. 대렴에는 초록화화주(草綠禾花 紬) 1점을, 재궁의대에는 2점의 초록공단(草綠貢緞), 남공단(藍貢緞) 중치막을 사용하였다(「正祖實錄」, 54 卷24年6月29日, 7月3日). 「승정원일기」에는 습․소 렴․대렴․재궁의대의 기록이 있는데, 「실록」과 일 치한다(「承政院日記」, 正祖24年6月29日, 7月3日). 「빈전혼전도감의궤」 삼방의궤(三房儀軌) 에는 습 에 중치막 두벌을 사용하였는데, 남화한단(藍禾漢緞), 초록화한단(草綠禾漢緞), 안에는 백공단(白貢緞)을 사 용하였다(「正祖殯殿魂殿都監儀軌」 三房儀軌).

    순조대에는 「승정원일기」에 초록색의 보공 1점 의 중치막의 기록이 있다(「承政院日記」, 純祖30年8 月2日). 「빈전혼전도감의궤」 삼방의궤 에 습에는 중치막 두벌을 사용하였는데, 남화한단(藍禾漢緞), 초록화한단(草綠禾漢緞), 안에는 백공단(白貢緞)이 다(「純祖殯殿魂殿都監儀軌」 三房儀軌).

    헌종과 철종의 「빈전혼전도감의궤」 삼방의궤 에 습에는 한 벌의 중치막이 사용되었다(「憲宗殯殿 魂殿都監儀軌」, 「哲宗殯殿魂殿都監儀軌」 三房儀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왕의 습에 중치막을 사 용한 시기의 기록은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록」에서 중치막을 사용하는 시기는 영조대, 「승 정원일기」에서는 경종대, 「빈전혼전도감의궤」 삼 방의궤 에서는 정조대이다. 이 때 습의인 곤룡포와 답호 안에 받쳐 입는 철릭이 중치막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색상은 옥색과 남색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 로 초록색 순이었다. 직물은 단을 가장 많이 사용했 으며, 그 다음은 능과 주이다. 무늬는 용문, 운보문, 포도문 등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형태는 1965 년 해인사 소장의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판이 보 관되어 있는 장경판전을 재중수하던 중남각 중앙 중 도리 받침 아래쪽에서 나온 광해군의 중치막 유물이있어 확인할 수 있다(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2006).

    2.Crown prince

    왕세자의 중치막에 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 「빈 궁혼궁도감의궤」 삼방의궤 에서 보이며, 습과 소 렴에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왕세자의 습의를 살펴보면 문효세자 습의 는 「승정원일기」에서 곤룡포-쾌자-중치막-장의, 「빈 궁혼궁도감의궤」 의주에서는 곤룡포-답호-철릭으로 되어 있다. 효명세자의 습의는 「빈궁혼궁도감의궤」 의주에서 곤룡포-답호-철릭으로 되어 있다(Table 3).두 문헌에서 기록의 차이가 보이는데, 이는 「빈궁 혼궁도감의궤」가 전대의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여 형식적으로 기록하여 다름을 알 수 있다.

    중치막을 착용한 것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승 정원일기」에서 문효세자의 습과 소렴에 기록이 있 으며, 「빈궁혼궁도감의궤」 삼방의궤 에는 소렴에 기록이 있다. 습에 사용된 중치막은 3점이며, 직물 은 자적단(紫的緞)․연두색단(軟桃色緞)․옥색별문 단(玉色別紋緞)이다(「承政院日記」, 正祖10年5月11 日). 소렴에는 남경광주(藍輕光紬) 중치막 한 점이 있다(「承政院日記」, 正祖10年5月12日, 「殯宮魂宮都 監儀軌」 三房儀軌).

    왕세자 중치막의 직물은 단(緞)과 주(紬)를, 색상 은 자적․연두․옥색․남색 등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3.Aristocratic

    중치막과 관련된 기록은 16세기에 이문건의 「묵 재일기」 중 1553년의 일기, 「쇄미록」(1592), 「순천 김씨 언간」에 표기되어 있다. 이후 17세기에는 「현 풍곽씨 언간」, 「상례언해」, 18세기에는 「사례편람」 (1746)과 「홍재전서」(1799), 19세기에는 「광례람」 (1893)과 「숙재집」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중치막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묵재일 기」중 1553년 1월 30일 일기에 ‘며느리[子婦]가 면 주(綿紬) 중치막(中赤莫)을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 이며, 이후 1590년대 「쇄미록」(1592) 등에는 ‘中赤 莫’으로, 1580년대 「순천김씨 언간」에는 ‘듕치막’ 으로 언문 표기되어 나타난다(Yetgil museum, 2010). 1600년대 「현풍곽씨 언간」에는 ‘핫듕치막’으로 언 문되어 있어 솜을 넣어 만든 중치막임을 알 수 있 다(Daegu National Museum, 2011). 「상례언해」(1623) 에서는 중치막을 포오(袍襖), 「사례편람」(1746)에서 는 포오(袍襖) 중의 하나로 중치막이 기록되어 있 다(「喪禮諺解」, 卷之一, 九, 「四禮便覽」 卷之三, 喪 九). 「홍재전서」(1799)에서는 중치막을 연거복으 로 착용한 기록이 있다(「弘齋全書」, 卷百六十九日 得錄九政事四). 「광례람」(1893)에서는 습(襲)에 남 색 겹 중치막을 제시하고 있다(「廣禮覽」 卷之一, 喪 禮). 「숙재집」(19세기)에서는 ‘中致莫’의 기록이 보인다(「肅齋集」 卷之八, 書, 答任明老).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중치막을 착용한 시기는 임 진왜란 이전부터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색상은 남 색, 직물은 면주를 사용하였으며, 명칭은 한자로 ‘中 赤莫’과 ‘中致莫’, 언문으로는 ‘듕치막’으로 표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대부들이 중치막을 착용한 것은 18세 기 회화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Fig. 1>에서 중 치막은 겉옷으로 착용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포 안 에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실질적으로 다른 포 안 에 중치막을 입은 것은 신경유의 수의에서 확인된 다. 이외에 밀창군이나 이익정의 염의(斂衣) 등에서 도 중치막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Fig. 2>, <Fig. 3>에서 착용한 모습이 있으며, 평 상시에 중치막을 많이 착용한 것을 알 수 있다.

    III.Changes of Jungchimak Form through Relics

    중치막의 유물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유물이 남아 있어 시대별로 형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중치막 유물의 현황을 조사하고, 시대에 따른 형태변화를 알아본다.

    1.Present condition of relics

    중치막의 유물은 2014년 8월 현재 16~19세기까 지 전체 53건에 251점이 있다. 출토유물은 249점, 전래유물은 2점이다(Table 4).

    시대별로는 <Fig. 4>와 같이 16세기에는 1건에 1 점, 17세기에는 35건에 175점(전반기: 24건 104점, 후반기: 11건 71점), 18세기에는 12건에 68점(전반기: 8건 58점, 후반기: 4건 10점), 19세기에는 5건에 7점이 있다.5

    기: 8건 58점, 후반기: 4건 10점), 19세기에는 5건에 7점이 있다.가장 많으며, 그 다음은 겹, 솜, 홑 순서이다.

    중치막 유물의 직물을 살펴보면 견이 196점, 면 13점, 마류 3점, 미확인 39점이었다. 대부분이 견이 었으며, 종류로는 주, 초, 능, 단, 사 등이다(Table 5)

    유물 중 무늬가 있는 직물을 사용한 것은 총 24 점으로, 17세기에는 18점, 18세기에는 6점이 있다. 17세기에 광해군의 유물은 운보문단, 신경유 묘의 유물에는 12점(운보문단, 운문단, 화문단7, 화문능 1, 문주2), 김여온 묘의 유물에는 2점(여의문능, 세 화문능), 동래정씨 묘의 유물에는 소화문단 3점이 있다. 18세기에 김덕원 묘의 유물은 문주, 남오성 묘의 유물에는 문주 3점, 이황 묘의 유물은 자미사, 이직 묘의 유물은 오호로문주이다.

    2.Changes of form

    중치막의 형태 변화에 대해서 Lee(2003)는 진동 과 소매통의 치수 차이, 배래선의 변화, 중치막의 밑단 너비 변화와 무의 크기 변화 등으로, Hong (2008)은 소매, 트임, 무 너비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깃, 소매(모양, 진동과 소매통의 비율), 겉섶, 당(襠)과 무, 총길이와 옆트임 길이, 품 과 밑자락 너비의 비율 등으로 분류하여 시대별로 형태변화를 살펴본다. 조사한 유물 중 치수 비교가 어려운 어린이 중치막 5점(평양조씨 1점, 해평윤씨 3점, 홍우협 1점)은 제외하였다.

    1)Git(collar)

    중치막의 깃 모양은 칼깃과 이중칼깃, 목판당코 깃, 둥근깃 형태가 있다. 16세기에는 칼깃, 17세기 에는 이중칼깃과 목판당코깃, 칼깃으로 다양하였 다. 대부분 칼깃이나 유일하게 정휴복의 중치막은 이중칼깃이다. 목판당코깃은 광해군 중치막에서 확 인되었으나, 최근 발표된 심설의 중치막 5점도 목 판당코깃이다. 18세기에는 칼깃, 목판당코깃, 둥근 깃이다. 목판당코깃은 이혁 묘 유물 1점에 있다. 이 시기에는 칼깃에서 깃의 머리가 둥근 깃 형태로 변 화하였다. 19세기에는 둥근깃이다. 시기별로 깃의 형태 변화를 정리한 것은 <Table 6>이며, 깃의 형태는 이중칼깃․칼깃․목판당코깃에서 점차 둥근깃으 로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Somae(sleeve)

    Changes of sleeve shapes

    소매는 모양과 탈착 여부에 의해 구분할 수 있다. 소매 모양은 크게 착수형, 두리소매형, 광수형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소매의 분리 여부에 따라 통수 형과 탈착형으로 나눌 수 있다.

    소매 모양에 따라 살펴보면 16세기 최진 배위 묘 유물의 소매는 진동과 같은 착수형이다. 17세기 전반기에 정휴복 묘의 유물 2점은 수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착수형이며, 점차 진동에서 엇선으로 완 만하게 내려오는 두리소매형으로 변하게 된다. 후 반기에도 두리소매형이나 전반기에 비하면 소매너 비가 넓어져 진동에서 소매까지 내려오는 각도가 급격해진다. 18세기 전반기에도 두리소매형이나, 후 반기에는 광수형으로 되어 19세기까지 같은 모양 이다.

    소매의 탈착 여부에 따라 살펴보면 대부분이 통 수형이나, 17세기 마세준 묘 유물 2점, 신경유 묘 유물 29점 중 18점, 김여온 묘 유물 10점 중 1점, 묘 주미상 묘 유물 3점 중 1점만이 탈착형 소매였다. 시대별 소매 모양의 변화를 정리하면 <Table 7>과 같으며, 착수형에서 두리소매형으로 변화하여 광수 형으로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The ratio of armhole to sleeve opening

    16세기 최진 배위 묘 중치막 유물의 소매너비는 진동과 같다. 다만 수구부분에는 곡선으로 둥글려 있다. 17세기 전반기에 진동에 비해 소매가 가장 좁은 것은 정휴복 묘 유물로 비례가 1:0.88이며, 진 동에 비례해서 소매가 가장 넓은 것은 류지경 묘의 유물로 비율은 1:1.46이다. 후반기에 소매너비가 가 장 좁은 것은 김여온 묘의 유물이 1:0.7, 가장 넓은 것은 홍우협 묘의 유물이 1:1.87이다. 18세기 전반 기에는 남오성 묘의 유물이 1.33로 가장 좁았으며, 소매가 가장 넓은 것은 김덕원 묘의 유물이 1: 2.08 이다. 18세기 후반기에는 이진숭 묘 유물이 1:1.33 으로 가장 좁고, 1:1.75로 가장 넓었다. 소매 너비의 시대별 변화를 정리한 것은 <Table 8>로, 소매 너비 가 후기로 갈수록 진동보다 넓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Geotseop(panel sewn on front opening for overlapping)

    겉섶은 이중섶과 단일섶이 있다. 이중섶은 겉섶 이 하나로 마름되어 있지 않고, 옷감이 이어져 두 개로 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이중섶에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깃머리부분부터 섶이 두 개로 나뉜 것과, 섶의 너비가 좁아지면서 겉섶 끝부분에 삼각 형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겉섶이 하 나로 되어 있는 단일섶이 있다. 조선전기의 이중섶 은 겉섶의 너비가 넓어서 직물의 폭이 좁기 때문에 이을 수밖에 없었다. 후기로 갈수록 겉섶의 너비가 좁아지게 되면서 이중섶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16세기 최진 배위 묘 유물의 겉섶너비는 33cm이 며, 끝에 bodyfig.gif으로 된 이중섶이다. 17세기 전반기에 겉 섶의 너비가 가장 좁은 것은 순흥안씨 묘 유물로 34.5cm이다. 가장 넓은 것은 배천조 묘 유물의 겉 섶너비가 58cm이다. 17세기 후반기에 너비가 가장 좁은 것은 정재후 묘 유물로 32cm이며, 김여온묘 유물은 46cm로 가장 넓다. bodyfig.gif으로 된 이중섶은 이직 묘 유물을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다. 18세기 전반 기에는 홍진종 묘 유물의 겉섶이 32.5cm로 가장 좁 으며, 이황 묘 유물의 겉섶너비가 42.8cm로 가장 넓다. 후반기에는 이진숭 묘 유물 2점이 37cm로 가 장 좁으며, 43cm로 가장 넓다. 19세기에는 흥선대 원군 유물의 겉섶너비가 26.7cm로 가장 좁으며, 홍희준 묘 유물로 겉섶너비가 41cm로 가장 넓다. 겉 섶의 시대별 변화를 정리하면 <Table 9>와 같으며, 후기로 갈수록 겉섶의 너비는 좁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Dang & Mu(side panel)

    당(襠)은 삼각형 모양으로 소매와 무 사이에 있 는 것으로 무와 연관성이 있다. 또한 무는 사다리 꼴과 삼각형이 있다.

    16세기에는 당과 사다리꼴 무로 되어 있다. 17세 기 전반기에는 당이 있다가 점차 없어지기도 하고, 무도 사다리꼴에서 점차 삼각형으로 변하다가 이 후 없어지게 된다. 후반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다 리꼴 무와 당은 고성남 씨(17세기 중후반)까지 남 아 있다. 18세기 전반기에부터 19세기까지 당은 없 으며, 무는 김덕원과 남오성 묘의 유물에서만 끝에 삼각형으로 이어졌으며, 이외에 19세기까지 무는없다. 시대에 따른 당과 무의 형태 변화를 정리한 것은 <Table 10>으로 무의 모양이 사다리꼴에서 삼 각형으로 변화한 후 17세기부터 점차 사라지게 되 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의 형태의 변화에 따라 소매와 무 사이에 달려 있는 당은 사라지게 된다.

    5.The ratio of the total length of outer collar to the length of side slits

    옆트임의 길이는 중치막의 총길이와 비율로 살 펴봐야 한다.

    16세기 최진 묘 유물의 총길이:트임 길이 비율은 1:0.34으로 트임이 길지 않다. 17세기 전반기에는 정휴복 묘 유물의 트임이 1:0.28로 가장 짧고, 김확 의 옆트임이 1: 0.28~0.75cm로 가장 길다. 후반기에 는 홍극가 묘 유물이 1:0.37로 가장 짧고, 김여온 묘 유물이 1:0.69로 가장 길다. 18세기 전반기에는 이 황 묘 유물이 1:0.54로 가장 짧고, 남오성 묘 유물이 1:0.61로 가장 길다. 후반기에는 이진숭 묘 유물 2 점이 1:0.60로 가장 짧고, 1:0.64로 가장 길다. 19세 기에는 흥선대원군의 유물이 1: 0.74~0.75로 추정 된다. 시대에 따른 옆트임 길이의 변화를 정리하면 <Table 11>과 같으며, 총길이에 따른 옆트임 길이의 비율은 후기로 갈수록 점차 길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6.The ratio of chest size to the width of lower end

    16세기 최진 배위 묘 유물의 품과 밑자락 너비 의 비율은 1:1.85이다. 17세기 전반기 비율이 낮은 것은 순흥안씨 묘 유물로 1:1.53, 가장 비율이 높은 것은 행주기씨 묘 유물이 1:2.14이다. 17세기 후반 기 비율이 가장 낮은 것은 홍우협 묘 유물이 1:1.2, 가장 비율이 높은 것은 김여온 묘 유물이 1: 1.62이 다. 18세기 전반기 비율이 가장 낮은 것은 이직 묘 유물이 1:1.13, 가장 비율이 높은 것은 남오성 묘 유 물이 1:1.59이다. 18세기 후반기 비율이 가장 낮은 것은 이익정 묘 유물이 1:1.08, 가장 비율이 높은 것 은 이익정 묘 유물이 1:1.33이다. 19세기에 비율이 가장 낮은 것은 이연응 묘 유물이 1:1.10, 가장 비율 이 높은 것은 흥선대원군 유물이 1:39이다. 품과 밑 자락 너비의 비율을 시대별로 정리하면 <Table 12>와 같으며, 밑단의 너비가 좁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IV.Conclusion

    본 연구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남성들이 대표 적으로 입었던 중치막에 관한 것이다. 문헌과 회화 를 중심으로 착용례(着用例)를 살펴보고, 지금까지 발표된 유물을 통하여 형태 변화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치막을 착용한 대상은 왕 이하 사대부들 이었다. 왕이 중치막을 착용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역대 」빈전도감의궤」․」빈전혼전도 감의궤」 삼방의궤 에 나타나며, 숙종대부터 사용 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실제적인 유물 로는 광해군의 중치막이 있어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용도로는 습, 소렴, 대렴, 재궁의대, 해인사 장 경판전을 재중수할 때의 공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습의로 착용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경 종대 이후 곤룡포의 받침옷인 철릭을 대신하여 장 의와 중치막을 착용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러한 변화는 조선후기 복식의 착용변화를 반영한 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철릭의 사 용빈도가 높아 출토유물도 많은가하면, 조선후기에 는 현저하게 수량이 줄어든다. 따라서 많이 착용하 는 중치막이 습의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의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 다. 남자 장의의 출토유물은 16세기 후반 이후에 보 이지 않은데, 반면 영조와 정조대의 기록에는 많이 보이고 있다. 이때의 장의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 고 있는 포로 볼 건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 에 대한 연구는 추후과제로 남긴다. 왕세자는 」승 정원일기」, 」빈궁혼궁도감의궤」 삼방의궤 에서 문 효세자 습과 소렴에 중치막을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사대부들이 착용한 것은 문헌에서는 」묵재일기」, 」쇄미록」, 」순천김씨 언간」, 」현풍곽씨 언간」, 」홍 재전서」, 」상례언해」, 」사례편람」, 」광례람」, 」숙재 집」등에서 보이며, 실제 유물에서는 수의와 염의로 착용한 것을 알 수 있으며, 회화자료에서는 착용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에서 관복 과 다른 포(袍)의 받침옷이나 평상복, 염습의로 사 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문헌으로 살펴 본 결과, 중 치막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착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왕의 중치막의 직물은 단을 가장 많이 사 용했으며, 그 다음은 능과 주이다. 무늬는 용문, 운 보문, 포도문 등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색상은옥색과 남색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 초록색 순이었다. 왕세자의 중치막의 직물은 단과 주를, 색 상은 자적․연두․옥색․남색 등을 사용하였다. 사 대부의 중치막의 직물은 면주를, 색상은 청색계열 과 소색계열을 사용하였다.

    셋째, 중치막 유물은 2014년 8월 현재 53건 251 점이다. 시대별로 16세기에는 1건에 1점, 17세기에 는 35건에 175점, 18세기에는 12건에 68점, 19세기 에는 5건에 7점으로 17세기의 유물이 가장 많았다. 유형별로는 홑이 6점, 겹이 54점, 솜이 40점, 누비 가 135점, 미확인 16점으로 누비가 가장 많았다.

    넷째, 형태는 시대별로 깃, 소매의 모양, 진동과 소매통의 비율, 겉섶, 당(襠)과 무, 총길이와 옆트임 의 길이의 비율, 품과 밑자락 너비의 비율이 변화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깃의 형태는 이중칼 깃․칼깃․목판당코깃에서 점차 둥근깃으로 변화 하였다. 소매의 모양은 착수형에서 두리소매형으로 변화하여 광수형으로 되었다. 진동과 소매통의 비 율은 소매통의 너비가 후기로 갈수록 진동보다 넓 어졌다. 겉섶의 너비는 후기로 갈수록 좁아져서 이 중섶에서 단일섶으로 변하였다. 당과 무의 형태 변 화는 무의 모양이 사다리꼴에서 삼각형으로 변화 한 후 17세기부터 점차 사라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의 형태의 변화에 따라 소매와 무 사 이에 달려 있는 당은 사라지게 된다. 총길이에 따 른 옆트임 길이의 비율은 후기로 갈수록 점차 길어 졌다. 품과 밑자락 너비의 비율은 후기로 갈수록 밑단의 너비가 좁아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 결과가 중치막의 시대 감정을 위한 기준이 되어 추후 연구에 활용되기를 바란다.

    Figure

    RJCC-22-670_F1.gif

    Jusageobae. Genre painting album by Hye-won.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 (2002). p.163

    RJCC-22-670_F2.gif

    Hanlimgyeomsuchansi. Highlights of an illustrious life.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2002). p.98

    RJCC-22-670_F3.gif

    Yeongwangjeongyeonhoedo. Banquet for the governor of Pyeongyang. from National Museum of Korea. (2002). p.44

    RJCC-22-670_F4.gif

    Present condition of relics by the times

    RJCC-22-670_F5.gif

    Present condition of relics by types

    Table

    Shroud of the king in literature

    Jungchimak of the king in literature

    Shroud of the crown prince in literature

    Present condition of Jungchimak

    *Type: S: single layer, D: double ply, C: cotton padded, Q: quilt, U: unconfirm, ♦: Unable to measure
    **Dankook Univ.: Dankook Univ. Seok Juseon Memorial Museum

    Detailed analysis of fabric

    Changes of git by the times

    Changes of sleeve shapes by the times

    Change of sleeve opening by the times (cm)

    Changes of geotseop by the times

    Changes of Dang & Mu by the times

    Changes of the ratio of the total length of outer collar to the length of side slits by the times

    Change of the ratio of chest size to the width of lower end by th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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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end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