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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6-0401(Print)
ISSN : 2383-6334(Online)
The Research Journal of the Costume Culture Vol.22 No.1 pp.16-27
DOI : https://doi.org/10.7741/rjcc.2014.22.1.016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traditional hemp textile production of Gurye at Jeollanam-do in modern times (1920s~1980s)

Seung Yeun Choi†
Dept. of Anthropolog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Korea
Corresponding author : (chltmddus2018@hanmail.net)
October 18, 2013 January 6, 2014 February 10, 2014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of and changes in hemp textile production practices at Gurye in Jeollanam-do in modern times. To do this, in this study, both a literature review and fieldwork research were utilized as research methods. The literature review focused on Gurye’s hemp data, and the fieldwork research involved two separate trials. Male and Female residents of Gurye who had experience in the area of hemp production from the 1920s to the 1980s participated in this study.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 regarding hemp fiber cultivation in Gurye, hemp cultivation continued to the 1970s and there were no changes in hemp cultivation practic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era. Second, there have been very important changes in hemp kilns over time. In the 1950s, there were both single-body kilns and separate-body kilns in Gurye. Later, specifically in the 1950s, a new type of kiln using an iron pot appeared, and the most modern kilns were concrete structures. Third, in Gurye, women cooperatively removed hemp husks immediately after stemming, subsequently bleaching the hemp by soaking it in lye or caustic soda. Over time, there have been changes in ash types and in soaking periods. Fourth, loom types changed from the traditional Korean back-strap loom to the treadle loom in the 1930s- to 1940s. Fifth, since the 1970s, the hemp textile output levels of Gurye have been reduced due to the westernization of clothing styles, the inflow of Chinese hemp fiber and government regulations pertaining to hemp cultivation.


근대 시기(1920~1980) 전라남도 구례군의 전통 삼베 수공업 생산 방식의 특징과 변화

최 승연†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초록


    I.Introduction

    마섬유는 식물학 상으로 그 종류가 수십 종으로 분류되지만,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재배되어 사용되 어온 마섬유는 대마(hemp)로 불리는 삼베와 저마 로 불리는 모시(ramie)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재배 연대가 빠른 섬유의 종류도 견섬유와 함 께 마섬유로서, 삼국지(三國志, 卷13, 東夷傳, 弁辰 傳, 三國志, 卷30, 濊傳)와 후한서(後漢書, 卷85, 東 夷列傳第七十五濊傳)에는 상고시대부터 마섬유를 재배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삼국시 대부터 마섬유 안에서도 대마와 저마의 명칭 구분 이 시작되었다. 상고시대부터 시작된 대마 생산은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어 15C의 세종실록지리지, 16C 신증동국여지승람, 18, 19C 임원경제지의 기록들에 는 한국 전국 8도의 각 지역별 마직물(대마, 저마) 생산지역들에 대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대마 의 경우, 15C에는 다른 지역들을 포함하여 호남지 방에 속하는 전라남도(영광, 남원, 광양, 보성, 화순, 장흥, 동복, 나주, 남평, 고흥, 옥과, 구례, 순천, 영 암, 장성, 곡성, 창평)의 대부분 지역들에서는 대마 직물(이후 삼베로 통칭함)이 많이 생산되고 있었으 며, 개항기 이후 일제 강점기부터 근대화되는 시기 까지 이 지역들의 삼베 생산은 지속되고 있었다. 개항기 이후 일제 강점기 이전 시기까지의 삼베 생 산 방식은 조선시대까지의 삼베 생산 방식과 유사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 후 그리고 근대화 과정을 거쳐 1970~1980년대 농 촌에서 점차 전통 삼베 생산이 사라지게 된 시점까 지는 그 이전과는 다른 변화들이 있었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부터 1970~1980년대 전통 삼 베 생산이 사라지게 된 기간 동안 호남지방에서 삼 베 생산지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재 까지 발굴, 조사되지 않은 전라남도 지역들의 삼베 생산 문화 연구의 필요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본 연구 조사 대상지인 전라남도 구례군은 돌실나이 삼베로 유명한 곡성 바로 옆 지역으로, 위에서 언 급한 조선시대 직물 생산 지역과 관련된 15C의 문 헌기록에서도 중요한 삼베 생산지로 알려진 지역 이었다. 또한 1918년대 일본에 의해 진행된 한국의 중요한 삼베 생산지들에 관한 조사 기록에서도 함 남, 평북, 강원, 경남북 5도를 비롯하여 전라남도에 서 곡성, 보성, 화순과 함께 포함된 중요 지역이 구 례군(Cho, 1992)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들 중 구례군의 삼베 문화에 관한 학술적 연구 는 한 번도 진행되거나 발표된 적이 없었다. 따라 서 본 연구의 목적은 전라남도 권역별 삼베 생산 문화 연구를 위한 시작으로서, 1920년대에서 1980 년대까지 섬진강 유역 구례군의 전통 삼베 수공업 생산 문화의 특징과 변화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이 다. 본 연구는 현재까지 연구되지 않았던 구례의 전통 삼베 생산 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규명하는 첫 시도라는 점, 그리고 이 연구를 기초로 하여 호남 지역 및 한국의 다른 지역권별 직물 문화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실증적인 자료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II.Method

    1.Research method

    연구방법은 문헌조사와 현지조사 두 가지 방법 으로 이루어졌다. 문헌조사는 구례의 삼베 생산과 관련된 자료가 제시되어 있는 문헌자료를 일차 조 사 자료로 활용하였다. 현지조사는 1차 조사는 2010 년 6월 19일부터 6월 25일까지, 2차 보완 조사는 2012년 11월 25일부터 2012년 12월 10일까지의 조 사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사지역은 구례의 1 개 읍(구례읍), 7개 면(용방면, 광의면, 산동면, 마 산면, 토지면, 문척면, 간전면)의 모든 지역에서 실 시되었다.

    2.Data collection

    인터뷰 대상자는 구례의 1개 읍, 7개 면 각 마을 에서 1920~1930년대부터 마을에서 삼베 생산이 사 라지게 된 1980년대까지 삼베 생산과 관련된 직접 적인 경험이나 기억을 지닌 연령대의 남, 녀 주민 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특히 구례군은 장수 마을로 유명한 지역으로서 80~90세 이상의 마을 주민들이 많이 생존해 계시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들 연령대 의 주민들을 통해 본 연구와 관련된 시대적 상황에 관해 중요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3.Data analysis

    2회에 걸친 현지 조사 수집 자료들은 일차적으로 녹취 자료 전체를 점검하고, 연구에 필요한 구술 내 용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차적으로 선별된 현지 조사 수집 자료들은 삼베 전체 생산 과정의 순서에 따라 삼베 재배, 삼굿, 삼째기와 삼 잇기, 삼띄우기, 직조 등의 자료별로 분류, 정리하 였다. 이와 같이 분류, 정리된 현지 조사 자료들은 문헌 자료 그리고 다른 지역 사례와 비교되어 본 연구의 자료로서 사용되었다.

    III.Review of Literature

    현재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삼베에 관한 연구들 은 수치상으로 매우 많지는 않지만, 의류학 분야 이외에도 지리학, 인류학, 민속학 분야 등 여러 학 문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삼베에 관한 선행연구들은 주제 차원에서 분류하면 크게 고고 학적 유물과 유적을 통한 전통 삼베 도구에 관한 연구(Park & Son, 2008; Jeon, 2011), 전통 수의의 변화 과정 안에서 삼베 수요의 변화와 삼베 생산 연구(Kim, 2001; Lee, 2011; Moon, 2009), 화순, 보 성, 안동 등 대표적인 삼베 생산지들의 전통 삼베 수공업의 변화와 현재의 존립 형태에 관한 연구 (Lee, 1997; Joung, 1990; Cho, 2003), 길쌈 용어 연구 (Cho, 1985), 길쌈 노래 연구(Park, 1993), 보성, 무 주, 삼척 등 지역별 전통 직물 생산 방식에 관한 연 구(Go, 2004, 2006; Kwon, 2001), 삼베 생산 기술에 관한 연구(Kim, 2010; Lee, 2006), 농촌 지역의 삼 베 생산으로 파악되는 노동 조직 연구(Lim, 1997), 삼베 생산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에 관한 연구(Bae, 2002) 등이 있었다.

    의류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진행되 었던 삼베에 관한 연구들은 양적으로 많지는 않지 만, 시기적으로는 전통에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 다. 특히, 전통 시기보다는 근대 시기, 또한 주제면 에서는 한국 지방의 삼베 생산 문화에 관한 연구들 이 많았다. 그러나 본 연구 주제와 관련된 지방의 삼베 생산 문화에 관한 연구들과 관련한 선행연구 들은 지역적으로는 화순, 보성, 안동, 무주, 삼척 등 한정된 몇 개의 지역들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호 남지방의 경우, 화순, 보성, 곡성 세 지역의 삼베 생 산 문화에 관한 연구로 한정되어 있고, 이 지역들 이외의 호남의 다른 지역들의 삼베 문화에 관한 연 구는 현재까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본 연구 대 상지인 구례군은 돌실나이 삼베로 유명한 곡성군 의 접경지역으로서 곡성군과 동일하게 전통시기부 터 1970년대 중반까지 삼베 생산이 이루어졌던 지 역이다. 그러나 구례군이 삼베 생산과 관련한 중요 성이 있음에도 현재까지 인접 마을인 곡성군의 삼 베 문화에만 연구가 이루어졌고 구례군의 전통 삼 베 생산 문화 및 변화 과정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 는 진행된 바 없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 지 역별 직물 생산 문화의 특징과 시간에 따른 변화 연구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제시하면서 1920년대부 터 삼베 생산이 사라지게 된 1980년대까지 전라남 도 구례군의 삼베 생산 문화 특징과 변화를 조사하 였다.

    IV.Results & Discussion

    1.Hemp production in Gurye

    1)Hemp cultivation

    한국에서 재배되는 마직물은 일반적으로 대마와 저마 두 종류로서, 일반적으로 대마는 삼베, 저마는 모시라고 부른다. 동일한 마직물에 속하는 삼베와 모시는 섬유 품종, 생육 조건, 제사 과정 등의 차이 가 있으며, 특히 생육 조건의 차이로 인해 재배지 역이 동일하지 않다. 먼저 모시는 아열대성 작물로 서 추위에 약하고 생육기에 습도가 많아야 하기 때 문에, 건조한 지역에서는 재배하기가 쉽지 않다. 따 라서 충남 서천, 부여, 보령, 서산, 전라북도, 경상 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지역 일부에서 생산되는 등 호남지역에서 모시는 삼베나 면만큼 재배지역이 일반적이지 않다. 반면, 삼은 성장기간에는 온도와 습도가 높고, 성숙기에는 건조해야 하지만,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좋아 북부지방에서 남부지방까지 생 산지가 넓게 분포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1970, 80년대까지 호남 지방 대부분의 지역들에서 는 면과 함께 삼이 재배되었다. 구례군 제보자들과 의 면담 결과, 1920~1930년대 구례군에서도 대부 분의 가정에서 삼을 직접 재배하여 생산하였지만, 모시를 생산했다고 하는 제보자들은 거의 없었다. 간혹 모시를 직조했던 사람들은 모시를 직접 밭에 서 재배한 경우는 없었고, 다른 지역에서 유통된 모 시실을 시장에서 사다가 직조만 한 것(임봉순, 1921 년생 구례읍 거주, 유삼순, 1916년생 마산면 거주, 김쌍생, 1919년생 용방면 거주)이었다. 이러한 경우 도 구례군 전체의 사례에서 매우 소수의 일이었다.

    삼을 밭에서 수확하여 직조단계를 거쳐 삼베를 생산하는 시기는 북부 지방인 함경북도, 강원도는 겨울철 농한기, 함경남도에서는 5월에서 9월 사이, 안동에서는 2월에서 3월 중 그리고 구례와 같은 남 부지방에서는 8월과 9월 사이로, 동일한 한국에서 도 마직물을 생산하는 시기는 지역마다 해당 지역 의 농사 환경, 벼농사 주기, 기후와 생산 조건에 의 해 차이(Kwon, 1989)를 보인다. 그러나 삼씨를 파 종하고 수확하는 시기는 지역적으로 비슷하게 음 력 3월에 논 혹은 밭에 파종을 하고, 6월 중순에 성 숙하게 되면 다 자란 삼을 베어내게 된다. 구례군 은 전체 토지의 비율이 논과 밭보다는 산악지대의 비율이 더 많은 지역으로서 면직물도 많이 재배되 었지만, 인접하고 있는 돌실나이 삼베로 유명한 곡 성군과 마찬가지로 삼 재배에 더욱 적합한 지역이 다. 구례군이 위치한 전라남도 전체 지역의 지형과 삼 생산지의 관계를 분석한 경우도 이와 유사한데, 전라남도의 지형은 크게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 태로 동부는 산지, 서부가 평야지대이다(Cho, 1992). 따라서 산지가 많은 동부지역인 곡성, 구례, 보성, 담양 지역이 전라남도의 주요 삼베 생산지라는 사 실도 이와 유사한 원리이다. 1920~1930년대 구례 에서 삼베를 생산했던 면담자들은 주업인 농사 이 외에 부수적으로 밭이나 산에 삼을 직접 재배하여 삼베를 생산하였다. 구례 면담자들은 삼씨를 밭에 심는 일을 “삼을 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은 삼씨를 뿌릴 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서는 제 일 먼저 밭을 호미로 갈아엎는 작업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삼씨를 뿌리는 작업에는 남녀 공동 노 동이 필요한데, 호미로 땅을 갈아 놓은 다음, 남성 들이 갈아 놓은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리면 여성들이 다시 뿌려진 삼씨를 흙으로 덮고 고르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례군은 일제식민지 시기 일본 에 의해 삼 재배 및 삼베 생산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면과 견의 경우, 1920~1930년대 구례군에서는 한국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일 제가 식민지 지배기간 동안 한국을 원료 공급지로 하여 수탈해 갔었던 중요한 섬유품목들이었기 때 문에 식민지 지배 전, 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 를 들어 섬유 종자의 경우만 비교할 경우, 면은 재 래면에서 육지면으로 종자 개량, 견도 조선 누에에 서 왜 누에로의 누에 품종의 개량과 산뽕나무에서 왜뽕나무로의 뽕나무 품종 개량 등을 통한 생산량 증가를 위해 강제적인 변화가 있었다. 이에 반해 삼 역시 일제시대 야주마(野州麻)가 유입(Cho, 1992) 되었지만, 삼베는 일본 수탈의 핵심 대상이 아니었 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 구례군에서 삼 품종이 재래종에서 야주마 종으로 전환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구례군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로 정부의 저곡가 정 책에 의해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불리한 상황이 전 개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 이전 농촌 지역에서 농사의 부업 일거리에 속한 직물 수공업을 통해 소 득 창출을 유도하고자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구례군을 포함한 인근 다른 지역 들에서 삼베를 포함한 섬유 재배 및 직물 생산량 증가(Cho, 1992)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기 구례군 대부분의 농가들에서는 면과 견 이외에 삼 재배, 제사, 제직 및 삼베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 었다. 따라서 구례군에서 1920~1930년대부터 1970 년대 후반 삼베 생산이 점차 사라지게 된 시점까지 삼베를 생산한다는 의미는 삼을 재배 가능한 토지 를 소유한 경우에는 삼 파종, 제사, 직조 작업까지 모두 수작업에 의해 진행되는 전체적인 과정이었 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대마 허가제와 중국산 삼 베의 유입으로 인해 구례군을 포함한 인근 다른 지 역들에서 삼 재배가 급격히 감소한다. 현재까지 전 라남도에서 삼베 생산지로 잘 알려진 곡성과 보성 의 경우도 동일하게 대마 허가제와 중국산 삼베 유 입 시기에 삼베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거나 삼베를 전혀 생산하지 않는 농가들이 증가하였다(Go, 2004). 그러나 곡성과 보성의 경우, 그 이전보다 삼베 생 산량이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1980년대부터 2000년 대까지는 자구책으로 삼 재배, 삼 제사 과정을 생 략하고, 중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들여온 삼실을 구 입하여 다양한 형태로 직조(섞은 베, 수입 마사 베, 중국 모시 베, 개량 포 등)만 하는 분업화의 형태를 보이며, 삼베 생산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에 반해 구례군은 대마 허가제가 실시된 1970년대 중 반을 기점으로 삼 재배를 거의 하지 않게 되며(Table 1), 동시에 삼 재배의 중지는 삼베 직조를 포함한 삼베 생산이 사라지게 되는 의미라는 점에서 인근 곡성, 보성 지역과는 차이를 보였다.

    2)Hemp spinning process

    Hemp kiln

    구례군에서는 봄에 파종해서 길게 자란 대마를 대략 6월말에서 7월의 더운 여름 동안 수확한다. 수확된 생삼 자체로는 섬유로 사용할 수 없는데, 대마에서 섬유로 이용 가능한 부위는 섬유 표피의 섬유다발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삼을 쪄서 우 선 목질부와 인피섬유를 분리하고, 인피섬유의 표 면에 있는 표피를 벗겨내어 섬유로 사용될 인피섬 유를 얻어내는 일이다. 복잡한 삼베 제사 과정 중 첫 번째 많은 노동력과 복잡한 공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소위 ‘삼굿’이라고 불리는 삼찌기 과정이다. 삼찌기는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로 남 성들이 전담하거나 남녀 공동 작업 혹은 마을 주민 전체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수확하여 길이 도 길고 부피도 큰 생삼을 한 번에 찌는 삼 굿 작업 은 노동의 양과 기술 그리고 도구 등 매우 어렵고 도 힘든 과정을 필요로 한다. 본 연구를 위한 조사 과정에서 구례군 면담자들에 대한 면담 결과, 삼굿 방식에 있어 시대별 특징과 변화에 대한 공통적인 구술을 얻을 수 있었다. 구례군 삼굿 방식은 대략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1920~1950년대, 1950년대 이 후 1970년대 후반까지 시기별 특징과 변화 내용이 파악되었다.

    Traditional kilns identified by archaeological excavation in the period of the Three Kingdoms

    한국에서 삼 재배에 관한 문헌기록의 상한 연대 는 삼국지(三國志, 卷13, 東夷傳, 弁辰傳, 三國志, 卷 30, 濊傳)와 후한서(後漢書, 卷85, 東夷列傳第七十五 濊傳)의 기록을 통해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국 고고학 자료로서 정식 발굴, 조사된 자료 안에서 파악된 삼을 찌기 위한 가마는 삼국시대부터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 다.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삼국시대 삼가마의 형태 는 발열실과 증숙실이 합치된 일체형 삼가마와 삼 가마가 2개로 별개인 분리형 삼가마 두 가지이다 (Park & Son, 2008). 본 연구를 위한 조사 결과, 특 이점은 이와 같은 삼국시대 일체형과 분리형과 동 일한 원리의 삼가마가 구례군의 전통 삼굿 형식으 로 1950년대까지 모두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Kilns type in Gurye

    One-body type kiln

    구례군 삼굿 방식에 관한 면담 조사 결과, 흥미 로운 사실이 파악되었다. 즉, 위의 삼국시대 일체형 삼가마 형식(Fig. 1)과 동일한 원리의 삼굿 방식이 구례군에서 1950년대까지는 지속되고 있었다는 사 실이다. 그러나 구례군의 구덩이 한 개를 파는 삼 굿 방식은 삼국시대 일체형 삼가마 형식(Fig. 1)과 동일한 원리이지만, 구례군의 방식에서는 그림에 제시된 격벽의 구조가 없었다. 구덩이를 한 개 파 는 삼굿 방식에 대해 이차순(1919년생, 광의면) 씨 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구뎅이를 한 개 파 고, 돌을 수북히 쟁여서 삼을 쟁여. 쟁여진 삼 위에 는 집채만 하게 덕석을 뚜껑으로 또 덮고 흙으로 한 번 더 덮어. 구뎅이 밑에다 불을 때고 돌이 달궈 지믄 맨 위 덕석하고 흙에 구멍을 뚫고 물을 줘. 그 믄 짐이 서려가꼬 삼이 익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외에도 면담자 6명(이일남, 1919년생 광의면, 김쌍생, 1919년생 용방면, 서금철, 1920년생 산동 면, 한필남, 1917년생 산동면, 유삼순, 1916년생 마산면, 김석두, 1915년생 토지면)도 일제시대부터 1950년대 무렵까지 구례군에서 구덩이를 한 개 파 서 행하는 삼굿 방식을 이차순 씨 설명과 동일하게 묘사하였다.

    이와 같이 구례의 노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1950 년대 이전의 구례의 전통적인 삼굿 방식은 마을의 산이나 냇가 옆, 즉 물이 지나가는 길 옆에 구덩이 를 파고 그 안에 장작나무나 나뭇가지, 풀 등을 깔 고, 그 위로 돌 무덤과 같이 돌을 쌓는다. 특히 고고 학적 발굴로 확인된 삼국시대 가마 역시 강 주변에 서 발견된 것과 비교해 볼 때, 전통적인 방식의 삼 굿 위치는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가 중요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돌 다발 위로 삼 다발을 세로나 가로로 높이 쌓고, 높이 쌓은 삼 다 발 위로 덕석이나 가마니로 싸고, 다시 공기가 새 어나가지 않도록 흙으로 덮는다. 그리고 돌 밑에 쌓은 장작나무나 나뭇가지, 풀에 불을 놓아 바로 위에 쌓인 돌들이 뜨겁게 달궈지도록 몇 시간씩 불 을 땐다. 몇 시간 후 돌이 뜨겁게 달구어지면 덕석, 가마니 그리고 흙 위로 물구멍을 내어 물을 집어넣 으면 달구어진 돌과 물이 만나 뜨거운 김이 서리고, 그것으로 인해 삼이 익혀지게 되는 방식이었다. 또 한 이 방식의 삼굿은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 라, 삼베 재배 후에 전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대규모의 행사였으며, 삼굿의 대가로 돈 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마을 주민들의 공동 노동에 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구덩이를 한 개 파서 돌 의 뜨거운 증기를 이용해 삼을 찌는 방식은 닥나무 를 찌는 일종의 “딱굿”이라 불리는 방법과 동일하 였다. 하동군과 인접해 있어 하동군과 혼인이 잦았 던 토지면의 한 할머니인 김순악(1943년생, 토지면 거주) 씨는 “시집 와서 삼굿하는 방법은 친정 하동 에서 닥종이 삶을 때 딱굿하고 방법이 똑같아. 하 동에서는 삼굿하는 것도 딱굿이라고 하고, 닥종이 삶을 때 같은 방법으로 했어. 구덩이 한 개를 파는 데 딱굿은 마을에 한 개만 있는데, 구덩이 옆 부석 에서 돌에 불을 때고 삼을 위로 쟁겨서 갑바로 덮 고 나중에 물을 부어서 삼을 익혔어.”라고 하여, 친 정인 하동에서는 닥나무를 찌는 방법(일명 “딱굿”) 을 설명하였다. 시집온 이후 구례에서 본 삼을 찌는 방법이 친정 동네의 “딱굿”과 동일하였음을 기억하 고 있었다.

    A separated body type kiln

    구덩이 한 개를 파는 삼굿 방식이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시기에 1950년대까지 구례군에서 사용되었 던 또 다른 삼굿 방식이 구덩이 두 개를 이용한 삼 굿 방법이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고고학 발굴로 확인된 삼국시대 분리형 삼굿 가마(Fig. 2)에서 행 해지던 삼굿 방식과 동일한 원리이다. 구덩이 2개 를 파는 방법은 돌을 뜨겁게 달구고 물을 부어, 뜨 거운 김으로 삼을 찐다는 점에서는 구덩이 한 개를 파서 하는 삼굿 방법과 동일하다. 그러나 삼이 위 치하는 장소에 있어서는 구덩이 한 개를 파는 방법 과 차이가 있었다. 아래의 설명을 통해 구덩이를 두 개 파는 방식의 삼굿 방법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김석두(1915년생, 토지면) 씨는 “삼베 찌는 것을 무 지, 눌굿한다고 해. 구뎅이 2개 파서 삼굿을 하는 것이 눌굿이여. 구뎅이를 두 개 파서 한 구뎅이는 통나무 위에 재갈을 얹어서 통나무에 불을 붙여서 뜨겁게 달궈 글고 한 구덩이를 옆에 한 개 더 파서 이 구덩이를 다른 구덩이와 긴 수로로 연결시키고, 다른 구뎅이에는 삼을 넣어. 달구어진 재갈에 물을 부으믄 뜨거운 짐이 옆 구덩이로 흘러들어가서 삼 을 익히게 혀, 그것을 무지, 눌굿한다고 하는 거여.” 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옥순(1914년생, 토지면) 씨 역시 같은 방식을 말해 주었다. 위의 구술에서 제 시하고 있는 구덩이를 두 개 파는 삼굿 방법은 구 덩이 한 개는 밑에 통나무, 나뭇가지 등 불이 잘 붙 는 재료들 위로 돌무덤을 쌓는다. 나머지 한 구덩 이는 삼다발을 높이 쌓아두고, 덕석, 가마니, 흙 등 으로 공기가 새지 않게 잘 막고, 이 두 구덩이 사이 를 연결하는 통로를 만든다. 돌이 있는 구덩이의 돌이 달구진 후 위에서 돌에 물을 부으면 뜨거운 증기가 연결 통로를 통해 옆 구덩이의 삼 다발로 전해지게 해 삼을 찌는 방법이다. 구덩이를 두 개 파는 삼굿 방법은 구례 안에서도 토지면에서만 소 수의 노인들에게서만 확인되는 방법이었는데, 특히 구례의 산악지역에서 거주하던 노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A kiln using an iron pot

    위의 ➁, ➂의 구덩이 한 개와 두 개를 파는 삼굿 방식이 전통시기부터 대략 1950년대까지 함께 공 존하던 삼굿 방식이라면 이 방식들이 지속되면서 도 1950년대부터 또 다른 방법의 삼굿이 나타난다. 구덩이를 한 개 혹은 두 개를 파서 돌을 이용해 삼 을 찌는 전통적인 방법 이후에 등장하는 방법은 지 상 위로 삼굿 구조물이 올라오는 것이다. 구례군의 한필남(1917년생, 산동면) 씨는 “돌로 하다가 나중 에는 가마솥 걸어갔고 삼을 쟁여서 물 붓고 불로 때서 구웠어.” 오사애(1916년생, 토지면) 씨는 “구덩 이 하나를 파고 가마솥을 걸고 그 위에 물을 넣고 삼다발을 위에 올린 다음에, 밑에서는 불을 때서 삼을 익혀.” 이맹순(1918년생, 토지면) 씨는 “삼굿 은 가마솥을 넣어서 삼을 쟁여, 물을 붓고 구덩이 밑에다 불 때고 그 짐으로 삼을 익혀.” 한애원(1919 년생, 마산면) 씨는 “삼굿을 하는디, 아주 큰 가마 솥을 걸어요, 그 위에 삼을 눕혀서 쟁여 물을 붓고 뚜껑을 덮고 아래 부석에서 불을 때.” 이차순(1919 년생, 광의면) 씨는 하나는 바닥이 양철로 된 것에 삼을 쟁이고 처음부터 물을 부어놓고 불을 때, 뚜 껑은 양철이나 덕석을 덮어서 하는데, 시집 막 와 서는 구뎅이를 판 것으로 하다가 내가 40세나 50세 되었을 때는 양철로 된 삼굿을 했어.” 김형직(1941 년생, 용방면) 씨는 “어릴 때 어머니가 하실 때 기억 으로 땅은 안 파고 지상 위로 큰 삼굿 통의 안은 검 정색 쇠판(철판)을 깔고 물을 붓고 양쪽에도 철판으 로 만들고, 그 위에 삼을 쟁여서 삼을 구었어요. 삼 굿은 돈을 내지 않고 구어진 삼으로 삯을 제했어요.”

    가마솥 형태의 삼굿은 위의 구례군 면담자들의 공통적인 구술에 따르면 돌을 달구어서 삼을 익히 는 방법이 이후에 나타난 삼굿 방법으로 대략 1950 년대 이후에 등장하여 1970년대까지 사용했던 것 으로 추정된다. 보다 발전된 이와 같은 삼굿 방식 은 전통 가마솥 방식과 같은 원리로 불을 피우는 아궁이 위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솥단지 를 넣거나 바닥에 철판을 깔고, 그 위에 삼 다발을 높이 쌓는다. 지상 위로 높이 솟은 삼다발은 비닐 혹은 덕석으로 전체를 잘 감싸고 끈으로 묶는다. 그리고 삼단을 쌓은 후 물을 처음부터 삼과 함께 넣어서 쇠의 열 전도율을 이용하여 삼을 찌는 방법 으로, 가정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삼발이 위에 올려 놓고 솥에 찌는 것과 같은 원리로 볼 수 있다. 이 방식이 등장하였다고 하여 돌을 달구어서 하는 그 이전 시기의 삼굿 방식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느 시기까지는 이 세 가지 삼굿 방식이 공존하다가 점차 앞의 두 가지 방식은 사라 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Modern kiln

    가마솥을 이용한 삼굿 방식 다음으로 가장 현대 화된 삼굿 방식은 지상에 콘크리트로 된 삼굿 건물 을 짓고 건물 앞으로 출입구를 통해 레일이 달린 삼굿 통에 삼다발을 콘크리트 벽 안으로 운반해 기 름 보일러를 이용해 삼을 찌는 방식이다. 김순남 (1914년생, 광의면) 씨는 “삼굿은 현재 콘테이너 박 스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바닥은 쇠바닥 위에 구 멍이 난 쇠철망 위에다 삼을 쟁이고 문을 닫아서 삼을 쪘어. 삼굿 주인이 이용료를 받아, 돈으로 받 든지 아님 삼인지는 몰라.” 구례군은 20년 이상 전 통 직물 생산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현 재 구례군에는 과거에 사용하였던 현대식 기계 삼 굿의 형태는 남아있지 않다. 구례군의 현대식 기계 삼굿 형태는 구술 자료 이외에 흔적을 찾을 수 없 었다. 대신 구례 인접 마을인 돌실나이로 유명한 곡성 석곡면에는 현재 길가 옆에 방치된 현대식 콘 크리트 삼굿이 있는데, 인근 마을에도 같은 시기에 도입되었다는 면담자들의 구술 내용에 따라 구례 군의 현대식 기계 삼굿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추정 된다.

    일반적으로 안동지역에서도 삼굿을 행하는데, 삼 을 찐 후 뜨거울 때 겉껍질을 바로 벗기지 않고 건 조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물에 불려 사 용한다(Lim, 1997). 이에 반해 구례군에서는 삼굿 을 하고 증기에 달구워져 뜨거운 삼을 꺼내 열기가 식기 전에 겉껍질을 벗겨낸다고 하였다. 벗겨진 겉 껍질은 작업을 했던 여성들이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나누어 가져갔다고 했다. 삼굿 직 후 껍질을 벗기지 않는 안동군과는 다른 구례군의 삼굿 직후 껍질 벗기기 방식은 인근 다른 지역인 보성군(Go, 2004)과 화순군 북면 지방의 삼굿 방식(Joung, 1990) 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었다.

    Hemp tearing & connecting

    삼굿을 마친 후 뜨거울 때 껍질을 벗겨 낸 삼은 햇빛에 건조시키는데, 완전히 건조가 된 삼은 원하 는 굵기로 짼다. 삼을 째서 삼실의 굵기가 정해졌 으면 직조를 위한 긴 실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위 해 짧은 삼실들을 세로로 길게 이어가는 과정을 ‘삼 삼기’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곱비벼삼 기’와 ‘매내삼기’라고 하는 2가지 방식의 삼삼기 방 식이 사용되고 있다. 안동에서는 직기에 걸리는 세 로실로서, 강한 장력을 받아야 하는 날실은 매내삼 는 방식, 북에 담겨 가로실의 역할을 함으로서 상 대적으로 큰 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씨실은 곱비 벼삼기를 한다(Lim, 1997). 그러나 조사 결과, 구례 군에서는 안동 지역에서처럼 날실, 씨실 종류를 구 분해서 다른 방식으로 삼삼기를 한 것이 아닌 모든 실에 일반적으로 곱비벼삼기 방식을 사용하였다. 곱 비벼 삼기는 이을 삼실을 같은 방향으로 끝을 맞춘 후 비벼서 연결을 한다. 그리고 연결된 부분의 실 하나를 반대 방향으로 꺾은 후 이미 연결되어 있는 다른 실들을 허벅지에 대고 손바닥으로 다시 한 번 비벼서 연결해 주는 방식이다. 구례군의 삼째기와 삼삼기 방식은 일제시대 전, 후 그리고 1970년대까 지 도구나 기술에 있어서 변화가 없는 것으로 파악 되었다.

    Hemp bleaching

    삼베 생산 과정에서 삼굿 다음으로 지역적, 시대 적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삼 띄우기 과정이다. 일반 적으로 삼베의 종류를 익냉이와 생냉이로 크게 구 분할 때, 익냉이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는 전라남도 지역은 안동과는 다른 익냉이 방식을 사용한다고 알려져왔다. 익냉이와 생냉이 방식의 차이는 삼띄 우기 과정을 통해 삼베의 색을 탈색시키는 과정의 유무로, 익냉이는 삼띄우기 과정을 포함시키는 삼 베 생산 방식이다. 조사 결과, 구례군도 삼베 생산 에 있어 익냉이 방식을 사용해왔던 것으로 나타났 다. 그러나 익냉이 방식에서 삼실을 탈색시키는 재 료, 방법에 있어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있었음이 확 인된다. 일반적으로 삼 띄우기 과정이란 삼껍질의 누런 기를 빼는 과정이고, 색 내기는 삼 띄우기로 누런 기가 빠진 삼실에 색소를 입히는 과정이다. 전통적인 익냉이식 삼 띄우기 방법은 직기에 실을 올리기 전에 삼실에 한국의 농촌 지역 특징과 연관 되어 농사의 부산물인 콩깍지, 짚 등의 재 혹은 이 것들을 이용해 잿물을 만든 후 삼실에 바른다. 그 리고 불을 땐 방에 몇일 두었다가 씻으면 삼의 누 런 껍질이 벗겨지고 그 안에서 삼의 색이 보다 밝 아지는 탈색과정을 거치게 된다. 삼 띄우기에서는 각 지역의 이용 가능한 재의 종류, 방안에 재를 묻 혀서 묵히는 시간 등에 있어서 차이가 나타났다. 이옥순(1914년생, 토지면) 씨는 “자새(꼬임)하고 돌 굿에 올려갔고 잿물 묻혀서 방에다 한 삼일 놔두면 노랗게 실끗이 되면 물에 씻어서….”라고 하여 재 를 묻혀서 묵히는 시간은 대체적으로 2~3일 정도였 다. 또한 이용 가능한 잿물의 종류의 차이가 있었 는데, 유삼순(1916년생, 마산면) 씨는 “물레 자세해 서 실끝을 돌곳에 올려 실 끝에 콩대, 깨대로 한 잿 물을 놓고 방에 일주일 두고 재가 좋으믄 노랗고 재가 나쁘문 꺼멓고….” 한애원(1919년생, 마산면) 씨는 “삼 꾸어가꼬 또랑에 가서 돌로 끝을 다듬어 삼잇어서 물레로 자새가꼬 돌굿에 올려서 산에서 풋나무를 한 매운재, 그 독한재를 해. 매운재를 한 7일 해가지고(방에다 불을 땐 상태로) 하믄 처음엔 삼이 꺼먼색인디 삶으면 흰색이 되는데 이 때 하야 지라고 잿물을 넣는 사람도 있어.”라고 하듯이, 구 례 면담자들은 삼 띄우기에 일반적으로 콩대, 깨대 를 태운 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콩대나 깨대보다 더 강한 탈색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산에서 나는 나무의 재, 일명 “매운재” 혹은 “독한재”를 사용하 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기간은 짧게는 2~3일, 길게 는 일주일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적인 콩대, 깨대, 매운제들은 1950년대 이전까지 사용된 재료 들이었다. 1950년대 이후 앞서 언급한 삼굿 방식이 가마솥으로 변화되는 시기에 삼 띄우기 과정에도 전통적인 농업 부산물를 이용한 잿물에서 시장에 서 살 수 있는 화학 양잿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화학 양잿물은 1970년대 후반 구례군에서 전통적 인 삼베 생산이 사라지게 된 시점까지 사용되었던 재료였다.

    재나 잿물을 방에 묵힌 후 재와 잿물기가 빠져나 갈 때까지 며칠 동안 재를 묻혀 헹구고 햇빛에 말 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반복되는 과정 동안 삼 실이 탈색된다. 탈색된 삼실에 한 번 더 색을 곱게 입히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는 일반적으로 치자가 사용된다. 사용하는 치자의 양은 생산자가 삼실에 노란색을 어느 정도 주고 싶은가에 따라 결 정하는 것이다. 유삼순(1916년생, 마산면) 씨는 “물 레 자새해서 실끝을 돌곳에 올려…재 묻은 거 씻어 서 치자에 담그구(한 사나흘 담그어서) 노랗게 되 믄 돌곳에 올려서…. 라고 설명하듯이, 구례군에서 조사 결과, 색내기에 사용되는 재료는 주로 치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3)Hemp weaving

    Loom

    구례군에서 섬유의 종류에 따른 제직 도구의 차 이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단지, 1930년대부터 해방 후 근대화되는 과정 동안 직조 준비 과정과 직조 기술, 과정의 변화가 아닌 직기의 종류에는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파악되었다. 구례 지역의 직기의 변화 과정은 소위 조선 베틀 혹은 손베틀이라고 불 리는 한국의 전통적인 경사식 요기(腰機)에서 기계 베틀이라고 부르는 족답식 직기로의 이행이었다. 구례에서는 1930년대부터 1970, 80년대 마을에서 직조를 그만 두게 된 시기까지 대부분의 가난한 농 촌 마을에서는 조선 베틀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부 잣집에서는 족답식의 성능이 좋은 기계 베틀을 사 용하였다. 1930~1940년대 구례군의 족답식 직기의 유입은 가내 부업적으로 직물을 생산하는 농민들 개인에 의한 구입보다는 당시 직물 품질의 개량, 증산 장려를 위한 일제 식민 당국의 노력의 과정에 서 나타난 산업조합에 의해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일반 농가에서는 기존의 조선 베틀을 그대로 사용하고, 직조의 편리함과 생산량 향상의 이점으로 인해 부유한 농가에서 족답식 직기를 구 입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구례에서 직조된 직물의 종류는 조사 결과, 그것이 조선베틀이든 기계 베틀이든 섬유 종 류와 관련 없이 평직물만을 직조하였고, 문양직물 을 직조한 경우는 한 개의 사례도 확인되지 않았다.

    Hemp density

    삼베의 제직 승수는 일반적으로 면직물의 제직 승수와 거의 비슷하였다. 이옥남(92세, 간전면 거 주) 씨는 “지금 집에 보관 중인 바디가 닷새 바디인 디 닷새 바디는 바디 옆에다 칼집으로 다섯 개 자 국을 새겨.”같이, 삼베의 승수를 달리 할 경우 바디 의 종류도 달리 사용하였는데, 나무로 된 바디의 측면에 칼자국으로 승수를 기호로 표시하여 승수 별 바디를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삼베의 제직량도 면직물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보통 한필(20자)이 일 반적인 생산량이었지만, 솜씨가 매우 좋은 주민들 이나 기계 베틀이 마을에 등장하고 난 이후에는 하 루에 한필 이상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솜씨가 서툰 경우에는 기계 베틀이 있는 경우라도 며칠 걸려 삼 베 한필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황례순(1916년생, 구 례읍) 씨는 “명하고 삼베는 하루에 한필(20자) 짜는 디 명주는 가늘고 까다로워서 하루에 한필 못 짜.” 이춘님(1920년생, 간전면) 씨는 “삼베는 내손으로 갈아갔고 씨를 뿌려서 하루에 한필, 닷새 베.” 임봉 순(1921년생, 구례읍) 씨는 “이녁 옷 해 입고 가져 다 팔기도 하고, 염색은 안 해 보고 삼베는 하루에 1필 짜는디 닷새, 여섯새, 일곱새 짯어.” 이옥순 (1914년생, 토지면) 씨는 “삼베는 가는 베 여덟 새 짜고 명주 베는 안 짰어.” 이일남(1919년생, 광의 면) 씨는 “삼베는 여덟 새, 아홉 새.”라고 말하고 있 다. 면담에서 확인되는 것은 구례군에서 삼베는 일 반적으로 닷새, 엿새 베를 가장 많이 직조하였다. 간혹 팔새, 구새는 좋은 옷을 해 입거나 특별 주문 을 받았을 경우에 직조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2.Discontinuation of traditional hemp production in Gurye

    조선시대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구 례군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되던 삼베는 (Table 2)에 제시된 것처럼 1970년대 초반부터 급격한 감소를 보인다. 삼베 단절의 첫 번째 요인으로 값싼 중국 산 삼베의 유입 문제이다. 또 하나는 장례 문화의 간소화 혹은 현대화 그리고 화장과 같은 새로운 장 례 문화의 변화와 함께 전통 삼베로 제작되던 수의 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통 수 의의 주요 소재가 되었던 삼베 수요가 급격히 감소 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요인으로 대마초 금지와 관련하여 정부의 대마 재배 허가제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조정란(1932년생, 산동면) 씨는 “70년대 후반 에 삼을 국가에서 심지를 못하게 해서 삼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그래서 그만 두었어.”라고 말하고 있듯이, 1970년대부터 구례군에서 삼 재배가 감소 하게 된 사회적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성 삼베로 유명한 인근의 보성 지역의 통계 자료(Boseong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1995)에서도 1975년 삼 재배가 정부 허가제로 되면서 농민들이 삼 재배 를 기피하게 되고, 그 결과, 보성 지역의 대마 생산 수치가 1976년부터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구례 군에서도 1974년 이후에는 삼 재배에 관한 통계 수 치가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는 것과 구례군 면담자 의 구술 내용을 종합하면 구례군에서도 정부의 직 물 재배 허가제가 전통 대마 재배를 중단하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 의 대마 허가제로 인해 인근 곡성, 보성 등 삼베 생 산 지역들 역시 동일한 시기인 1975년 전, 후의 삼 재배에 비슷한 감소 변화들이 나타난다. 곡성과 보 성 지역의 경우, 직접 삼을 재배하지는 않지만, 중 국산 삼실 혹은 모시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직접 재배, 제사 과정을 거친 삼실을 이용해 섬유 재배, 제사와 제직이 분업화되는 과정을 통해서라도 삼 베 생산이 지속된 특징이 파악된다(Go, 2004). 따라 서 곡성과 보성 지역은 근래까지도 대표적인 삼베 생산지로서 명맥이 유지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 들 인근 지역들과는 달리 구례군은 중국산 삼실과 삼베의 유입, 정부의 대마 허가제를 기점으로 삼베 생산의 분업화 과정이 아닌 점차 삼베 생산 감소라 는 방향으로 향하고, 결국은 생산 중단의 결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VConclusion

    본 연구는 지방의 직물 문화의 특징과 그 변화 양상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로서, 1920년대부터 1980 년대까지 전라남도 구례군의 삼베 생산 방식의 특 징과 변화를 살펴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지역에 대 한 문헌 자료 조사, 현지조사 자료를 통해 구례군 의 전통 삼베 수공업 생산 방식의 특징과 변화를 분석하고, 다음과 같은 결과가 제시되었다.

    첫째, 삼 재배 방식에서 구례군은 전체 토지 비 율이 논과 밭보다는 산악지대의 비율이 더 많은 지 역으로 삼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구례군은 조 선시대에 이어 1970년대 후반 삼베 생산이 사라지 게 된 시점까지 삼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모시는 재배되지 않았고, 시장에서 외부에서 유통된 모시 실을 구매하여 직조한 경우만 있었다. 또한 일본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면직 물과 견직물과는 달리 구례군에서 삼은 품종 개량 등의 변화는 없었다.

    둘째, 구례군의 삼 제사 과정에서 시대별 특징과 변화가 가장 많이 파악되는 것은 삼굿 방식이었다. 구례군에서는 1950년대 이전까지 고고학 발굴 자 료로 확인된 삼국시대의 일체형과 분리형 가마 형 식과 동일한 원리인 구덩이 한 개를 파는 삼굿과 구덩이 두 개를 파는 삼굿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삼굿 방식 이후로 지상 위로 가마솥을 이 용한 삼굿 방식이 사용되었고, 이후 가장 현대적인 삼굿 방식인 콘크리트식 구조물 형태의 삼굿이 사 용되었다.

    셋째, 삼굿 후 겉껍질을 벗기지 않고 건조한 후 에 사용할 때 물에 불려 사용하는 안동 지역과는 달리, 구례군에서는 삼굿 후 삼이 뜨거운 상태에서 여성들의 공동 작업으로 겉껍질을 벗겨낸 후 건조 하는 방식이었다. 삼삼는 방식에서는 씨실과 날실 모두 곱비벼삼기 방식을 사용하였다. 또한 구례군 은 재와 잿물을 이용하여 삼베를 탈색시키는 익냉 이 방식이 사용되었으며, 익냉이 방식이 시대적 차 이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익냉이 방식 안에서도 사용되는 재의 종류와 처리 기간은 시대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제직 도구에서 구례군은 조선 베틀에서 일 제 식민지 지배를 통해 기계 베틀이라고 부르는 족 답식 직기로 변화된 특징을 보였으며, 족답식 직기 로의 전환은 생산량 향상을 가져왔다. 제사 이후 제직 준비 과정은 다른 지역과 동일하였으며, 족답 식 직기로 전환된 경우에도 구례군에서는 평직물 이외 문양직물 직조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삼베 제직 승수는 보통 5~6새, 품질이 좋은 삼베는 8~9새까지 직조되었다.

    다섯째,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구례군에서 는 전통 삼베 생산이 중단되었다. 그 이유로는 장 례 문화의 변화에 따른 삼베 수요의 감소, 중국에 서 값싼 삼베가 시장에 유통되면서 가격 경쟁력이 상실된 것과 관련된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 실시 된 정부의 대마 허가제로 인한 삼 재배 기피 현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는 현재까지 연구되지 않았던 전라남도 구례군의 전통 삼베 수공업 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연구로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의 결과는 구례군과 인접한 전라남도 다른 지역들의 전통 삼베 생산 문화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는 연구 자료가 될 것이며, 이 연구를 시작으로 인근 지역의 전통 삼베 생산 문화에 관한 연구는 지속될 것이다.

    Figure

    RJCC-22-16_F1.gif

    The reconstruction diagram of one-body type hemp kiln in three kingdoms period. (From. Park, K. Y., Son, H. S. (2008). p. 63)

    RJCC-22-16_F2.gif

    The reconstruction diagram of separated-body type hemp kiln in three kingdoms period. (From. Park, K. Y., & Son. (2008). p.64

    Table

    Key informant list

    Hemp output from the 1968 to the 1975 in Gur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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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end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