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ntroduction
전라남도를 특징짓는 섬진강, 영산강, 탐진강 3개의 강 유역은 일반적으로 지리 적, 생태적, 문화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지리적으로 섬진강 유역에 속하는 지역들은 보성, 고흥, 곡성, 구례, 순천, 광양, 여수로, 섬진강 유역은 동쪽으로는 낙동강 유역, 서쪽으로는 영산강 유역과 접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에 걸쳐 있지만, 전라남도가 40% 이상으로 섬진강 유역에서 전라남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영산강 유역 은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시작하여 전라남도 중서부 지역을 지나 서해로 연결되는 강으로, 3개의 강 유역 중 전라남도의 가장 많은 지역들(광주, 목포, 나주, 무 안, 함평, 화순, 담양, 영암, 해남, 영광, 장성)이 영산 강 유역에 속해 있다. 따라서 그 동안 전라남도 문화 는 다른 강 유역들보다는 영산강 유역의 문화로서 많 이 논의되어져 왔다. 탐진강 유역은 전남 장흥군․강 진군을 흘러 남해로 흘러드는 강 인근 지역으로서 전 라남도의 최남단 지역들을 일컫는다.
문화적으로 영산강 유역은 전남 서부지역으로 지 칭되어 한국의 2번째 곡창지대인 전남평야 지역으로 농경이 성행한 만큼 갖가지 농경문화가 발달된 곳이 다. 벼농사와 관련된 다양한 도작문화의 요소들이 발 견되고 있고, 특히 영산강의 수운과 함께 발달된 장 시들은 전국적인 다른 지역과의 문화 교류와 수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외부의 문화 영향을 많이 받았던 지역이다. 반면, 전남 동부지역으로 지칭되는 섬진강 유역은 논농사를 위한 평야지역도 존재하지만, 일반 적으로 산악지대가 많아, 논농사에 비해 밭농사가 발 달한 지역으로 문화적으로도 영산강 유역과는 구별이 되고 있다. 섬진강 유역 역시 수운을 따라 장시가 발 전하면서 다양한 물자와 지역 간의 교류를 통해 영산 강 유역과는 다른 지역문화들이 형성되어 온 곳이다.
본 연구는 근대시기 전라남도 지방의 지역별 직물 문화에 관한 기초 조사를 진행해오면서 다른 문화 요 소와 마찬가지로 전라남도의 직물 문화에도 권역별 로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이 존재하는가에 관한 연구 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이 미 2013년에 논문이 발표된 섬진강 유역권의 구례군 의 근대시기 면직물 생산문화에 관한 자료와 새롭게 조사된 영산강 유역권의 담양군과 화순군의 근대시 기 면직물 생산에 관한 조사 자료를 기초로 하였다. 미리 밝혀둘 점은 면 재배, 제사, 제직, 염색과 같은 기술적 측면에 관한 조사 항목들은 구례군과 마찬가 지로 담양군, 화순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것 은 면직물 생산과 관련된 세부적인 단계들은 지역적 차이와 상관없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서 3지역에 관 한 조사 항목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Ⅱ.Background
현재까지 진행된 영산강 및 섬진강 문화에 관한 연 구들은 크게는 고고학, 지리학, 민속학, 지방사, 건축 학 분야에서 진행되어왔다. 먼저 고고학적 연구들은 해당 강 유역에서의 시기별 문화적 특징(Lee, 2011; Lee, 2015; Lee & Lee, 2006)에 관한 연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리학 분야에서는 많은 연구는 아니지 만,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의 문화자원들의 시, 공간적 분포에 관한 연구들(Jang, 2013; Kim, Shin, Lee, & Jang, 2012)이 이뤄졌다. 섬진강 및 영산강에 관한 연 구가 가장 다양한 주제와 양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진 행된 분야가 민속학과 지역사 분야이다.
민속학에서는 영산강과 다른 지역권과의 문화 교 류(Na, 2007), 마을 신앙의 특징(Han, 2007), 신앙과 민속 문화의 구조적인 특징(Pyo, 2008, 2009), 영산강 유역의 자연 환경과 관련된 기술 연구(Byeon, 2011; Byun, 2012),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전체적인 민속문 화의 특징에 관한 연구(Pyo, 2012) 등 다양한 주제의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섬진강 유역에 관한 연구는 영산강 유역에 관한 연구 보다는 많지는 않지만, 민속 학적 측면에서 섬진강 민속의 문화적 의미에 관한 연 구(Park, 2014), 섬진강 유역 누정의 건축문화적 의미에 관한 연구(Kim, Cheon, & Lee, 2011) 등이 이뤄졌다.
살펴 본 바와 같이,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에 관해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로 연구들이 진행되 어져 왔지만, 다른 주제들에 비해 현재까지 전라남도 길쌈 문화를 유역권의 특징 차원에서 분석하거나 비 교하는 연구들은 그 동안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이미 학술지에 발표되었던 섬진강 유 역인 구례군의 근대 시기 면직물 생산 문화에 관한 연구(Choi, 2013)와 섬진강 유역인 구례군과 경계를 이루는 영산강 유역권인 담양군과 화순군의 근대시 기 면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비교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이를 위해 연구 내용으로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방에서 직물 생산이 사라 지게 된 시점까지 영산강 유역 담양군과 화순군의 면 생산 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조사하고, 이 결과를 섬 진강 유역의 구례군의 사례와 비교하여 영산강 유역 과 섬진강 유역의 근대시기 면직물 생산 문화의 특징 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Methods
1.Study object
본 연구는 근대시기 영산강 유역권의 담양군과 화 순군 면직물 생산 문화의 특징을 조사하고, 이를 섬 진강 유역의 구례군의 면직물 문화와 비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Study method
본 연구의 연구 방법은 크게 문헌 연구와 현지 조 사 연구의 2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Literature research
문헌 연구는 담양군과 화순군에 관한 기록이 제시 되어 있는 고문헌, 군지(郡誌), 군사(郡史), 통계 연보 등을 조사 자료로 활용하였다.
2)Field work research
현지조사는 1차 기초조사와 2차 보완조사 방식으 로 수행되었다. 1차 기초조사는 2010년 11월부터 12 월 초까지 한 달 동안 담양군과 화순군 지역에서 실 시되었으며, 2차 보완조사는 2015년 12월부터 2016 년 1월까지 진행되었다. 조사 대상은 담양군과 화순 군에서 일제강점기부터 전쟁 그리고 직물 생산이 사 라지게 된 시기까지 직물 생산에 관한 기억과 경험을 지닌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었다. 조사지역은 담양군 은 수북면, 용면, 대전면 3개 면, 화순군은 이서면, 도 곡면, 능주면 3개 면에서 실시되었다.
Ⅳ.Results & Discussion
1.Outline of Damyang-gun & Hwasun-gun
1)Damyang-gun
담양군은 전라남도 북단에 위치한 군으로 영산강 의 최상류 지역에 속하면서도 동남쪽으로는 섬진강 유 역권에 속하는 곡성군과 인접하고 있다(Damyang-gun, 1994)(Fig. 1). 담양지역의 전통적인 섬유 재배 작물 은 면화, 대마, 모시 등을 들 수 있는데, 면화는 조선 초 기부터 대마는 그 이전부터 재배(Damyang-gun, 1994)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담양지역은 다른 전라 남도 지역과 달리 전통적으로 직물 수공업 이외 지역 특산자원인 대나무를 활용한 죽세 공예품 및 기타 죽 세 관련 상품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2)Hwasun-gun
화순군은 북쪽의 담양군과 함께 영산강 유역권의 동 쪽 끝 지역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동쪽으로 섬진강 유 역권인 곡성군과 순천시, 보성군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 다. 화순군의 전통적인 섬유작물로는 면화, 저마, 견 등 이 있다. 특히 화순군은 전라남도에서 2번째로 양잠업 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고, 화순읍에 있는 제사회사에서 많은 양의 양잠을 회수하고 있다(Hwasun-gun, 1980).
2.Fiber cultivation(Damyang-gun & Hwasun-gun)
담양군과 화순군의 섬유재배에 관한 조사에서는 섬 유 재배 방식(시기, 공동작업 여부)과 일제 강점기 전, 후의 면화 품종에 관한 면담을 실시했다. 조사 결과, 1930년대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면화 재배의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봄에 자신 소유의 밭에 면화씨를 뿌려서 추석 전에 수확하는 것이다(이 **, 1934년생, 담양군 수북면; 정**, 1941년생, 담양 군 수북면; 이**, 1929년생, 화순군 도곡면). 그러나 면화를 재배할 밭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수확한 면화 솜을 나누어서 받고, 그 댓가로 면직물을 직조 해서 갚는 “베내기” 방식(유**, 1932년생, 화순군 능 주면)을 해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담양군과 화순군의 면화 품종에 관한 주민들의 면담 결과, 일제강점기에도 그 이전과 동일하게 육지면이 아닌 재래종으로 계속 파종하여 재배(문**, 1933년생, 화순군 천암리)하였다고 하였 다. 또한 1930년대 호남 지방에서 재배되었다고 추정 되는 황면은 담양군의 경우에는 거의 재배하지 않았지 만, 화순군의 경우에는 일반 면화 종자 이외에도 같 은 밭에서 황면과 일반 면 종자를 같이 파종하고, 재 배하였다고 하였다(유**, 1932년생, 화순군 능주면).
면화 재배에 있어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파악되는 공통된 특징은 첫째, 면화 파종은 3~4월쯤 시작해서 면화 솜이 완숙되는 8월 쯤 면화를 수확하였다는 것 이다. 또한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삼베 수확과 는 달리, 면화 수확은 주로 여성들이 담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면 종자는 문헌상으로는 일제 강점기 동안 전라남도 대부분의 지역들이 일본이 보급한 육 지면이 기존의 재래면을 강제적으로 대체한 것으로 추 정되고 있다. 그러나 면담결과,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일제 강점기 동안 재배된 면화 품종은 일본이 보급한 육지면이 아닌 전통적인 재래면이 지속적으로 사용되 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재래면에서 육지면 으로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구례군 의 사례와 담양군과 화순군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와 같은 결과는 일제강점기 동안 구례를 포함한 전라남도 지역들은 일본이 면화를 집중적으로 수탈 대 상으로 삼고, 육지면 재배를 강제시킨 것에 반해, 담 양군과 화순군에서는 다른 식민 정책이 진행되었음 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즉, 담양군은 전통적 으로 죽세공예가 직조공예보다 더 발달되어 있었다 는 점, 그리고 화순군은 일본이 종방 마을을 조성하 여 면화보다는 양잠을 중요한 수탈 대상으로 삼았다 는 점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재래면 이외 재배된 면 종자에 있어서는 담양군과 달리, 화 순군은 황면(노랑면)도 함께 재배되어 흰색 면직물과 함께 문양직물 직조에 사용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례군에서도 황면 재배가 확인되었는데, 이와 같은 황면 재배는 일제 강점기에 새롭게 등장한 면화 종자 의 변화라기보다는 단조로운 흰색의 면직물 직조에 변화를 주기 위한 지역적 기술 선택의 결과로서 해석 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셋째,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면 재배에 있어 토지 보유 유무와 관련한 “베내기”라고 노동력 교환의 문 제가 파악되었다. 섬진강 유역 구례군 지역에서는 이 같은 경우를 “수냇베 길쌈” 혹은 “피냇베”(Choi, 2013) 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그 명칭만 다를 뿐 구례군과 동일한 현상이 담양군과 화순군 지역에서도 이루어 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3.Spinning
면 제사 과정은 씨앗기(씨빼기), 솜타기, 솜고치말 기, 물레질의 과정으로 세분화되는데, 담양군과 화순 군의 주민들에게도 구례군과 동일한 면 제사 과정에 대한 주민 면담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담양군과 화 순군은 1930년대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면 제사 과 정의 변화가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었다.
1)Damyang-gun
면담 결과, 담양군은 이미 1940년대부터 1950년 전쟁 이전 사이 전통적인 씨아틀을 사용하여 가정에 서 전통방식으로 씨를 빼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로 기계를 이용한 씨빼기와 솜타기 작업(10가구 중 9가 구)이 보편화 되었다. 이 작업은 주로 마을 장터에 발 틀 조면기와 솜타는 기계를 갖춰, 이에 해당하는 작업 을 전문적으로 하는 상점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활 로도 하고 기계로도 하고 근디 손으로 퉁퉁 할라믄 얼마나 오래 걸리오. 그래서 다 기계로 했제… 처음에 는 그것(방앗간)이 없어가꼬 집에서 하다가 기계가 생 긴께 기계에서 씨앗고(씨빼기 작업 지칭), 타고(솜타 기 작업 지칭)해서 말아서 했제. 인자 방앗간에서 목 화씨 빼다가 또 솜을 타 기계에다가 타가꼬 와서 집 에서 인자 매달아놓고 꼬치 몰아갔고, 또 물레에다 돌려인자, 그래가꼬 면실 뽑아가꼬 날아가꼬 마당에 메가꼬 짰제.” 이**(1924년생, 담양군 수북면) 면담과 정**(1939년생, 담양군 대전면), 박**(1939년생, 담양 군 대전면)의 면담내용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확인되 었다. “면 탄데 가서 타. 방앗간이 저 아래 있었는데. 지금 헐어가꼬 없어. 옛날 방앗간 터(Fig. 2)는 마늘도 심어 놓고 했드만”이라고 했으며, 현재 조사 현장에 서는 옛 방앗간 터만 확인되었다.
2)Hwasun-gun
화순군의 경우도 면담 결과, 1930년대 이전에는 여 성들에 의한 씨빼기와 솜타기 과정은 대체적으로 전 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1940년대 이후에는 씨 빼기와 솜타기가 기계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 **(1933년생, 화순군 천암리)의 경우, 결혼 전인 15세 쯤에도 친정 마을인 화순군 장터에 방앗간이 있었다 고 했으며, 결혼 이후인 1950년대에는 화순군 전체적 으로 떡 방앗간과는 구별되는 능주 장터 방앗간에서 씨빼기와 솜타기를 하였다고 하였다. 유**(1932년생, 화순군 사평면)의 경우도 1950~60년대 화순군에서 씨빼기와 솜타기는 읍내 방앗간에 가서 했다고 한다.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보이는 면 제사과정의 공통 점은 첫째,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족답식 조면기와 솜타는 기계를 갖춘 상점(일명 방앗 간)이 마을에 존재하여 씨앗기와 솜타기 과정이 기계 화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구례군의 사례 (Choi, 2013)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구례군이 경우에 는 ‘방앗간’ 이외에도 ‘씨앗이방’(Choi, 2013)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어 지역별 명칭의 차이는 존재하 였지만, 그 기능은 유사하였다.
둘째, 면 제사과정에서 씨빼기와 솜타기 과정이 전 통적인 방식에서 기계화 작업으로 대체되었고, 나머 지 고치말기와 물레작업은 다시 가정에서 여성들의 개인 혹은 공동 작업에 의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속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제사 과정의 기계화와 수작업의 분화는 구례군과도 일치하였다. 고치말기와 물레작업 방식에서 이**(1933년생, 화순군 이서면)은 “근께 그때는 삼대 사대 오대가 같이 살았은께 품앗 이도 하고 그랬제… 가족 품앗이도 하고, 마을 사람들 끼리 품앗이도 하고 그랬제. 아무리 같이 살아도 가 족끼리도 힘든께 품앗이하고, 그 때는 많이 그랬어” 라고 하듯이, 방앗간에서 솜타기까지 기계 작업을 마 치고 난 후, 고치말기와 물레작업은 개인 작업이 아 닌 가족 단위 혹은 마을 단위의 품앗이 형태로 공동 으로 진행되었다. 공동 작업은 “한방에 5~6명 정도 빙 둘러앉아 일을 했다”라는 말로 보아, 그 작업 크기 를 짐작할 수 있다.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고치말기 와 물레 작업에 필요한 도구는 각 가정에서 남자 혹 은 목수가 제작해서 사용하였다.
4.Weaving & density
1)Damyang-gun
담양군에서 면담을 한 이**(1928년생, 담양군 수 북면), 정**(1932년생, 담양군 수북면), 유**(1932년 생, 담양군 대전면), 정**(1935년생, 담양군 대전면), 박**(1941년생, 담양군 대전면)은 1950년대 전, 후로 결혼을 하였다. 이들이 시집 온 직후 담양군 마을에 서는 기계베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결혼 이전 친정 동네에서도 부유한 집 에서 기계 베틀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계 베 틀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결혼 후 담양군 마 을에서 손베틀 이외에 기계베틀을 직접 사용했던 경 험이 없다고 하였다. 담양군 마을에서도 부유한 사람 들만이 기계베틀을 사용하였다.
1950년대 혼인한 남**(1933년생, 담양군 수북면) 은 기계 베틀의 구입은 특정한 기계 베틀 판매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 베틀의 형태를 알고 있는 마 을 목수가 기계베틀을 직접 제작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담양군에서의 기계베틀 사용 현황은 정 **(1939년생, 담양군 대전면)와 정**(1932년생, 담양 군 수북면)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담양군에서 제직한 면직물의 승수(升數)는 정**(1935 년생, 담양군 대전면)에 의하면 8새, 9새, 10새가 일반 적으로 많았다고 하며, 이**(1924년생, 담양군 수북 면)과 정**(1932년생, 담양군 수북면)는 10새가 가장 섬세한 상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담양군에 서는 일반적인 흰색의 면사를 이용한 평직물 제직 이 외 문양 직물의 제직은 파악되지 않았다. 제직 도구 인 손베틀과 기계베틀은 상점에서 구매하는 것이 아 니라, 모두 목수에게 제작을 의뢰해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제직도구들은 볼 수 없었으며, 현재까지 나산리의 이** 할머님이 소유한 도투마리 (Fig. 3)만을 볼 수 있었다.
2)Hwasun-gun
화순군 도곡면에 거주하는 문**(1932년생, 화순군 도곡면) 씨와 이**(1947년생, 화순군 도곡면) 씨는 시 집 온 후 화순군 마을에서 조선베틀과 기계베틀을 사 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베틀은 대략 2일 걸려서 1필(20자)을 직조하는 것이 가능하였고, 마을 부자들 은 기계베틀을 소유하여 1일에 1필 이상을 직조하였 다고 했다. 면직물의 승수는 주로 5새, 7새, 8새였으 며, 5새는 시장에 판매하고, 섬세한 7새와 8새는 자신 들의 옷을 해 입는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유**(1932년생, 화순군 능주면)은 화순군 안에서 도 산악지대 마을로 시집을 왔다고 했다. 화순군의 다른 평야지대 지역보다 산악마을에서 직조는 활발 하지 않아 조선베틀만 사용하였고, 기계베틀은 사용 하지 않았다고 했다. 면직물의 승수는 일반적으로 5 새, 9새가 최상품이었다고 했다.
김**(1924년생, 화순군 도곡면)에 의하면, 화순군 에서는 동일한 밭에 흰색의 일반 면화 종자와 황면 종자를 같이 재배하고, 직조할 때 흰색과 노란색 면 을 번갈아 직조하였다고 했다. “무늬? 아 그러니까 노 란면이랑 해가꼬 북을 두 개 해가꼬 짜 체크무늬같이 해가꼬, 두 개 해가꼬 짜는거여 하얀거랑, 노란거랑, 검정거랑 그러고 짜제.”라고 하는 것처럼, 화순군에 서는 동일한 밭에 흰색의 일반 면화 종자와 황면 종 자를 같이 재배하고, 직조할 때 흰색과 노란색 면을 번갈아 짜면서 이중직은 아니지만, 평직에 문양을 표 현하였다.
면직물 제직에서 보이는 담양군과 화순군의 특징 은 첫째, 1950년대 이전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족답식 직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구례군과 시기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전라남도의 군 단 위 마을들에 족답식 베틀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추 정할 수 있다. 둘째, 화순군에서 황면을 이용한 문양 표현은 현재까지 호남의 다른 지역 직조에서 이중직 을 포함해서 문양직 직조의 사례가 거의 나오지 않았 던 점을 감안하면 담양군과 구례군과 비교해서도 매 우 특이한 사례에 해당된다.
5.Dyeing
1)Damyang-gun
담양군에서 염색은 시장에서 물감 파는 상점인 일 명 “물장사 집”에서 화학 염료를 구매해서 염색하였 다고 했다(정**, 1935년생, 담양군 대전면, 박**, 1937년생, 담양군 대전면, 남**, 1933년생, 담양군 수 북면). 염색의 색상은 염료 상점에서 검정색, 붉은색, 옥색 등 다양한 색상의 염료를 구매하여 염색하였다 고 하였다.
2)Hwasun-gun
담양군과 유사하게 화순군에서도 염색은 시장에서 물감 파는 상점인 일명 “물장사 집”에서 화학 염료를 구매해서 염색하였다고 하였다(문**, 1932년생, 화순 군 도곡면). 마을에서 일반적으로 검정색 염료를 구 매하여 치마에 검정색 염색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면직물의 염색은 화학염료가 보 급되기 이전에는 염색을 하지 않고, 흰색의 면을 그 대로 사용하였다. 1940년대 쯤 마을 장터에 화학염료 를 판매하는 상점이 들어선 이후로 마을 주민들이 화 학염색을 하게 되었다. 구례군에서도 일제강점기에 화 학염료가 유입되어 일반 주민들에게 보급된 상황(Choi, 2013)이 담양군과 화순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 제강점기 화학염료의 보급 상황은 유역권의 지역차 이가 없이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6.Discontinuation of cotton production & weaving
주민들의 면담결과, 담양군 지역에서 면 재배 및 면 직조가 점차 감소하거나 사라지게 된 것은 1970년 대 초반부터로 파악되고 있다. 새마을운동 이전에는 여성들이 길쌈에 노동력을 치중했지만, 1970년대부터 새마을 운동과 함께 쌀 수확량 증가로 현금 수입이 많아지게 되면서 점차 농사 및 다른 현금성 작물들로 생계를 전환해갔다. 박**(1937년생, 담양군 대전면) 는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면서 “노 풍”이라는 쌀 품종이 들어와서 쌀 종자 바꾸고 수확 량이 늘어나서 돈벌이가 되니까 길쌈을 점차 조금씩 하게 되었어.”라고 한 면담 내용에서 이와 같은 사실 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화순군 역시 주민들 면담 결과, 담양군과 마찬가지 로 면 재배 및 면 직조가 점차 감소하거나 사라지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로 파악되고 있다. 이** (1947년생, 화순군 도곡면) 씨는 이웃마을에서 1970 년대 결혼을 하고 화순군 도곡면으로 왔을 당시에는 시집 마을인 화순 도곡면에서는 길쌈을 하는 집이 많 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1971년부터 1989년까지의 담양군과 화순 군 통계연보(Table 1)를 살펴보면, 담양군과 화순군의 면화 생산량의 증감과 소멸 시점이 파악된다. 먼저 담양군의 경우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완만한 감소 를 보이다가 1974년부터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이 와 같은 경향성이 1980년대까지 지속되고 1981년부 터 1982년까지는 통계 수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통계 수치가 다시 등장하는 1983년에는 1980년대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로 감소되어 있으며, 1987년부터 는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다 1989년에는 거의 생산이 중단된 생산량을 보이고 있다. 화순군의 경우도 유사 한 감소의 경향성을 보이고 있는데, 1971년 담양군보 다는 많은 재배 면적과 생산량을 보이다가 1973년부 터 1979년까지는 생산량 수치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통계 수치가 다시 등장하는 1980년도는 1972년의 절 반에 가까운 수치로 감소되어 있으며, 이후 계속 감 소세를 보이다가 1989년도에는 매우 적은 생산량을 보이고 있다.
담양군과 화순군 지역 간 면화 생산량 비교에서도 1971년부터 담양군과 화순군의 전체 면화 생산량 비 교에서 담양군이 182.8(M/T), 화순군이 251(M/T)로 화순군이 담양군보다 전체 면화 생산량이 많았다. 1971년부터 파악된 화순군보다 적은 담양군의 면화 전체 생산량 비율은 면화 생산이 거의 사라지게 된 1989년까지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것 은 근대시기 담양군이 화순군보다는 전체 면화 생산 규모가 작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2013년 발표된 연 구 자료에 제시된 1971년 구례군(섬진강 유역)의 전 체 면화 생산량 규모(면적 975ha, 생산량 689kg)와 구례군의 1980년대까지의 면화 생산량 추이를 비교 해 보면 담양군과 화순군의 면화 생산량이 구례군의 면화 생산량 규모보다 훨씬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구례군의 면화 생산량 규모보다 담양군과 화순군 은 훨씬 적은 면화 생산량을 보여준 요인들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담양군 홈페이지에 제시된 1962 년도 사진(Fig. 4)에는 양장 차림의 남성들의 모습과 함께 여전히 한복을 착용하고 있지만, 나일론으로 된 한복 치마를 착용하고 죽물 시장으로 가는 담양군 여 성들의 모습이 동시에 파악되고 있다. 1960년대부터 도시에서는 방직 산업의 영향으로 나일론과 같은 합 성섬유와 의복이 대량생산됨에 따라 담양군과 같은 농촌 지역도 도시 지역보다는 늦지만, 점차 이와 같 은 영향(Damyang-gun, 1994)을 받게 된 상황들이 점 차 힘든 노동과정을 필요로 하는 전통적인 면직물 생 산을 그만두게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요한 요인으로서 담양군의 경우, 전통적 인 주력 경제자원인 죽세 공예품(Fig. 5)에 관해 주목 할 필요가 있다. 담양 지방의 역사가 기록된 ‘추성지’ 에는 400년 전부터 담양에서 죽세공예가 시작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부터 담양은 대나무가 잘 자라는 지역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300년 이상 의 전통을 갖는 담양 죽물시장은 전국적 규모로 다양 한 종류의 죽세 공예품들이 거래되었다. 죽물시장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담양 전체 마을이 가업 또는 부업으로 죽세공예에 종사하였다. 1922년 일본인들은 질 좋은 죽제품을 착취하기 위해 참빗조합인 ‘진소조합’을 세웠고, 그 10년 후 조합의 총사령부격인 산업조합을 담양에 세우기도 하였다. 1947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5개국에 수출되었고, 해방 과 6․25전쟁 중에도 죽세공예 생산이 감소된 것이 아 니라, 방어용이나 각종 무기 제품으로 수요가 늘면서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죽세공예산업이 본격적으로 시 작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정부의 향토특화 산업에 대한 지원과 죽세 공업 센터가 설립되면서 부 터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는 담양 죽세 공예산업진흥 10개년계획이 체계적으로 수립됨으로 써 죽세공예경진대회가 개최되는 등 현대화 양상에 부 응하는 가운데 죽세품은 담양 농가소득 증대에도 크게 기여했던 시기이다(The Committee of The Journal of Jeollanam-do Province, 1995).
이와 같은 근대 시기 담양군에서의 죽세공예의 중 요성은 마을 주민들의 다음과 같은 면담에서도 파악 된다. 남**(1933년생, 담양군 수북면)은 “그 때 담양 은 죽세가 길쌈보다 돈이 더 되었어.” 유**(1934년생, 담양군 대전면) 역시 “담양은 옛날부터 죽세공예가 돈이 된께 다른 지역보다 길쌈 별로 안했어.” 박** (1941년생, 담양군 수북면)은 마을 전체가 대부분 대 나무 문발을 짜기 시작하고, 그것이 돈이 되면서 길 쌈은 그만 두게 되었어.”라고 하였다. 즉, 담양군에서 는 전통적으로 죽세공예에 마을 주민들이 생계를 의 존하는 구조가 이루어지면서 전라남도의 다른 인근 지역들에서 직물 수공예가 중요한 가내부업의 역할 을 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담양군 여성들은 면화 재배 및 전통 면 직조는 경제 적 부가 가치의 목적보다는 집에서 착용하는 의복 및 가내 소비를 위한 소량 생산을 하다가 1960년대 후반 부터 합성 섬유와 의복이 시장에 등장하게 되고, 또 동시에 전국적으로 담양 죽세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 하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급속하게 면화 재배 및 면 직조를 포기한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이런 원인 이 농사와 여성들의 직물 수공업이 중요한 경제원이 었던 구례군과 같은 지역에서의 면화 생산량과 담양 군의 면화 생산량이 상당한 차이를 보인 이유로 해석 된다. 따라서 고된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다른 작물 재배에 비해서 현금가치가 떨어지는 면화 재배 및 전 통 직조는 시장에 수입 직물과 기성복이 등장하면서 점차 주민들에게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멀어지게 되 면서 담양군 주민들은 조금씩 전통적인 면화 재배 및 직조를 그만두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화순군의 경우, 전통적으로 죽세공예가 주력 상품 이었던 담양군보다는 면화 생산량이 많았지만, 화순 군은 전통적으로 면화보다는 양잠 생산이 중요하였 다. 특히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이 화순군에 종방 마 을들을 조성하면서 화순군은 면화보다는 양잠 재배 에 더욱 치중하게 된다. 해방 후 수년간의 침체로 잠 업 생산은 잠업의 생산 기반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지 만, 1960년대 초부터는 선진국의 경제가 점차 발전하 면서 견직물의 수요가 확산되고, 생사 수출이 유명하 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농촌 산업 진흥 을 적극 양잠으로 권장하고, 특히 외화소득으로 용이 한 잠업이 적극적인 증산정책으로 추진되었다. 1970 년대부터 화순군의 면화 생산량이 감소하게 된 것은 1971년부터 진행된 정부의 잠업 증산계획과도 일정 부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Ⅴ.Conclusion
본 연구는 영산강 유역권의 담양군과 화순군의 근 대시기 면직물 생산의 특징과 변화 그리고 소멸의 과 정을 살펴보았으며, 이를 섬진강 유역권 구례군의 면 생산 문화와 비교하였다. 첫째, 면 재배와 관련하여 담양군과 화순군에서 일제 강점기 동안 재배된 면화 품종은 일본이 보급한 육지면이 아닌 전통적인 재래 면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재래면에서 육지면으로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구례군의 사례와 달리, 담양군과 화순군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동안 구례를 포함한 전라남도 지역들은 식민당국이 육지면 재배를 강제시킨 것에 반해, 담양군은 전통적 으로 죽세공예가 직조공예보다 더 발달되어 있었다 는 점, 그리고 화순군은 일본이 종방 마을을 조성하 여 면화보다는 양잠을 중요한 수탈 대상으로 삼았다 는 점에서 지역별로 다른 식민정책이 이뤄졌다는 점 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화순군은 황면(노랑면)이 재배 되어 흰색 면직물과 함께 문양직물 직조에 사용된 것 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담양군과 화순군에서는 면 재배에 있어 토지 보유 유무와 노동력 교환을 보여주 는 “베내기” 방식이 있었다. 이는 섬진강 유역 구례군 지역에서도 “수냇베 길쌈” 혹은 “피냇베”(Choi, 2013) 라고 하는 동일한 현상이 명칭만 다를 뿐 담양군과 화순군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이뤄졌다는 점이 파악 되었다.
둘째, 면 제사 및 제직과정에서 담양군과 화순군의 공통점은 일제 강점기 족답식 조면기와 솜 타는 기계 를 갖춘 상점(일명 방앗간)이 마을에 존재하여 씨앗 기와 솜타기 과정이 기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 그리고 조선베틀 이외에 족답식 직기가 유입되었다 는 점이다. 이와 같은 면 제사 및 제직 도구의 변화는 구례군이 경우에도 동일하게 파악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제사 및 제직 도구의 유입이 해당 지역들에 동일한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되었다.
셋째, 면 염색의 경우, 담양군과 화순군은 화학염 료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염색을 하지 않고 흰색의 면 을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일제 강점기 마을 장터에 화학염료를 판매하는 상점이 들어선 이후로 마을 주 민들이 화학염색을 하게 되었다. 구례군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화학염료가 유입되어 일반 주민들에게 보 급된 상황이 담양군, 화순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넷째, 면의 재배 및 직조의 단절과정에서는 담양 군, 화순군, 구례군의 지역 차이가 파악되었다. 담양 군은 전통시기부터 죽세공예가 유명하여 일제강점기 그리고 근대시기에도 죽세공예를 통한 주민들의 경 제 의존도가 매우 높았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담양군 은 면 재배 및 면직물 생산으로 가내 수입의 많은 부 분을 의존하지 않았던 측면이 전체 면화 생산량 규모 가 크지 않고, 비교적 빠른 시기에 면화 및 면직물 활 동이 사라지게 된 요인으로 파악된다. 화순군의 경우 도 일제 강점기 집중된 양잠 사업으로 인해 면화 재 배 생산량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에 반해 담양군과 화순군에 비해 매우 높은 면 생산 량이 파악된 구례군은 근대시기 다른 특용작물로 경 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합성섬유의 등장 이전까 지는 가내수공업으로서 면 재배 및 면직물 생산이 차 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것은 각 지역에서 면화 생산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동 력은 일상적인 자가소비의 측면보다는 가내부업으로 서 경제적 소득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영산강 유역권의 담양군과 화순군 그리고 구례군 의 근대 시기 면직물 생산의 특징을 비교한 결과, 황 면의 재배 여부 그리고 경제적 가치에 따른 면화 생 산의 지속과 단절이라는 지역적 선택의 문제를 제외 하고는 면화 재배, 제사, 제직과 염색 및 소멸 과정에 있어 대체로 기술적 측면에서는 지역적인 유사성들 이 파악되었다. 이와 같은 세 지역에서의 면직물 생 산 방식들의 유사성들의 이유는 추가적인 전라남도 다른 지역들에 관한 비교자료가 더욱 보충된 이후, 일반화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잠정 적으로는 전통시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지배층이 아 닌 지역의 일반 서민들의 면 생산 기술은 지역적으로 는 많은 다양성들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대화시기 정부 주도의 섬유 정책에 의해서 는 경제적 효용가치가 섬유 작물 생산을 유도하는 가 장 중요한 동인이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각각의 지 역적 선택들이 지역적 차이점들로 드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