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ntroduction
1989년 구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 중 가장 먼저 한국과 수교를 맺은 나라인 헝가리는 민족의 기원 이 대부분의 유럽 제민족 기원과는 달리 아시아로 부터 유래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더욱 친 근한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헝가리와 한국의 경제 분야에서의 교류는 2013 년 한국타이어가 유럽시장 공략 거점인 헝가리 공 장 증설 투자 발표 이후, 헝가리 공장 3차 증설에 2015년까지 3억 1,300만 유로를 투자에 대해 헝가 리 정부와 투자 의향서 및 실제 투자 계약을 맺을 것이라고 밝혔고, 국내 기업들의 헝가리 현지 투자 가 활성화되고 있다(Kim, 2014). 문화 분야에서는 먼저 한류의 확산을 들 수 있다. 2008년 한류의 시 원이 된 드라마 ‘대장금’이 유럽의 여러 나라 중 헝 가리에서 처음 방영되었고, 첫 방송이 나가자 시청 률이 최고 51%에 육박하였다. 이 드라마를 방영한 국영방송 MTV는 세 번 방영했으며, 이후 ‘선덕여 왕’, ‘동이’, ‘이산’, ‘파스타’가 차례로 방영돼 큰 인 기를 끌었다. 드라마와 더불어 K-팝의 열풍으로 한 류 인구가 급증하여 2013년 헝가리의 한류 팬 수는 26만 6215명(33개 동호회)이었으나 2014년에는 87만 328명(29개 동호회)으로 증가함으로써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증가와 더불어 콘텐츠·식문화사업으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한국기업의 수가 늘어날 것 으로 예상된다(Yang, 2015). 그 외 2014년 한국·헝 가리 수교 25주년을 기념하여 헝가리 국립 필하모 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와 정치·경제 분야에서도 긴밀한 협정체결 및 포럼이 개최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교류 행사 중 복식 부문에서 는 2013년 12월 3일부터 2014년 3월 9일까지 국립 고궁박물관에 이어 2014년 4월 1일부터 2014년 6월 14일까지 대구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헝가리 의 왕실 보물-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사회” 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에서 합 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통치했던 화려한 헝가리 왕실의 복식과 보물, 회화자료들이 소개되었다. 독 특한 헝가리의 문화와 유럽대륙 최고의 대제국이었 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화려한 문화가 조화된 이 시 기의 유물들은 복잡한 동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 문화를 매개로 하는 교류는 상대 국 가에 대한 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경제적 교류 활 성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복식 문화는 각 민족의 역사와 함께 진화한 산물로서 상대 국가 에 대한 이해를 보다 높임으로써 문화적 교류를 통 한 다양한 가치 창출할 수 있게 하여 연구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헝가리에 대한 선행연구는 헝가리 관련 어문계열 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복식 분야는 헝가리 여성복식에 대한 연구(Cho, 2015)가 있으며, 지리적 범위를 넓혀 동유럽 복식에 대한 선행연구 로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전통의상에 대한 연구(Cho & Lee, 2006; Choi, 2003; Choi & Cho, 2004; Kwon, 2003; Rha, 2009)가 진행 되었다. 발표된 연구 논문 수와 내용을 보면 국내 서 양복식에 대한 연구가 서유럽 중심으로 진행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헝가리의 왕실 보물-합스부 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사회” 특별전에서 전시된 유물을 중심으로 헝가리 남성복식에 대해 고찰해봄 으로써 서유럽 중심의 복식사 연구영역을 넓히고, 나아가 연구의 다양성과 헝가리 및 동유럽으로 진 출하고자 하는 한국기업의 현지 문화 이해를 위한 기초 자료 활용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연구방법으로는 전시된 남성 복식 유물자료 및 회화자료와 관련 문헌자료를 연계한 실증적 접근방 법을 사용하였고, 실제 전시된 복식유물자료는 돌만 2점, 멘테 2점, 바지 2점, 모자 2점, 신발 3점이며, 회화자료는 21점이다. 연구범위는 헝가리 남성복식 에 한정하여 헝가리 복식을 고찰함으로써 헝가리 민족의 고유한 감정과 동일한 의상체계, 사람들 간 의 유대관계 형성의 토대가 되는 헝가리 복식의 형 성배경과 복식의 기본 형식과 그 특징 및 변천에 주 목하고자 한다.
II.Background
1.General overview about Hungary
복식은 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타 민족과 구 분되는 특징적인 요소로서 자연 환경 및 사회 환경 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헝가리의 환경을 살 펴보면 헝가리의 복식요소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헝가리의정식명칭은 헝가리 공화국(Republic of Hungary)이다. 지형적 위치로는 북위 16°~22°, 동 경 45°~48°로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서 쪽으로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 남쪽으로는 세르비아와 접 해 있다. 헝가리의 국토면적은 남한면적의 0.94배에 해당하는 93,030km2이며, 전체 면적의 77%가 농지, 18%가 산림지대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마쟈르족으 로 92.3%이며, 독일인이 1.6%, 기타 슬로바키아인 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고, 국민의 52%가 가 톨릭교를 믿으며, 개신교가 20%, 그리스정교가 3%이 다(The Export-Import Bank of Korea, 2009).
헝가리의 기후는 온난하며, 세 개의 기후대로 나 뉘는데, 남부는 지중해성 기후, 동부는 대륙성 기후, 서부는 대서양성 기후이다. 국토의 중심부를 흐르는 다뉴브강이 헝가리를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있다. 유럽의 동양이라 불리는 헝가리인들은 인종적으로 는 마자르 인, 언어상으로는 우랄어 계통의 피노-우 그리아 어족(Finno-Ugric)으로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동양적인 색채가 발견된다. 전통 민속과 기독교 문 화가 공존하는 헝가리의 문화·예술 활동은 자수, 도자기, 천정화 및 벽화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민속 음악이나 연극도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세계적인 음악가와 미술가를 배출하였으며, 특 히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전통적인 집시 음악 등을 통해서 헝가리 민족의 우수성과 다양성을 알아볼 수 있다.
헝가리의 민속 의상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의상 가운데 하나로, 화려한 색상의 꽃무늬 패턴, 오 픈워크(open-work) 자수법과 같은 정교한 자수법이 유명하다. 헝가리 의상은 지리적, 생활 문화적 영향 에 따라 몇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지는데, 자수로 유 명한 중남부의 컬로처(Kalocsa), 남부의 시오아가르 드(Sioagard), 산악지대인 북부의 부야크(Buják)의 의 상, 헝가리 의상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화려한 의상이 라 할 수 있는 북동지방의 메죄쾨베슈드(Mezökövesd) 의 의상, 양치기나 기수의 의상으로 유명한 호르토 바지(Hortobágy) 지역의 의상 등이 대표적인 의상으 로 알려져 있다(Yoo et al., 2006).
2.Historical background
헝가리인들의 자기 민족에 대한 호칭은 ‘마자르 (Magyar)’인데 반해,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 는 헝가리인에 대한 호칭은 중세 이래 서유럽에서 형성된 헝가리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즉, 영어의 ‘Hungarian’, 불어의 ‘Hongrois’, 독 어의 ‘Ungarn’은 라틴어의 ‘Hungarus’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말은 현재는 ‘훈족’ 을 칭하는 단어 ‘Hunnus’와 유사하다. 이것은 헝가 리인들이 현재의 파노니아(Pannonia: 헝가리 서부지 방)지방에 들어와 정착했을 때 그들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기마 유목 민족적이고 이교도적이어서 훈족 과 동일시했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10세기 초의 알레마니엔(Alemannien: 고대 독일의 한 지방) 문헌에는 ‘Avari, qui dicuntur Ungar’, 즉 ‘헝가리인 들이라고 칭하는 아바르인’들이라고 쓰여 있기도 하다. 이러한 잘못들은 당시의 사가들이 여러 민족 들을 그들의 비슷한 문화양식만 보고 동일한 종족 으로 간주한 결과이다(Lee, 1996).
언어학상으로 발틱-우랄지역의 핀족-유그리아계 에 속하는 마자인 인들은 마침내 896년 파노니아와 트랜실바니아를 장악한 후 북상하여 다뉴브 강 중 류에 정착하게 되었고, 1000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 아들임으로써 유럽 기독교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Lee, 1999).
기독교를 국가로 변모한 헝가리는 이교도의 침입 을 막아내는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게 되 었다. 마챠시 1세(Mátyás Ⅰ, 재위 1458~1490년)의 통치 시기에는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영토가 확장되 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 학문 또한 크게 발전하였 다. 그러나 16세기 오스만-터키 제국의 침입으로 수 도 부다(Buda)가 함락되었고, 이후 약 100년간 오스 만-터키 제국, 트랜실바니아 공국, 오스트리아 합스 부르크 제국이 헝가리를 3분할하여 통치하는 기간 이 이어졌다.
오스만-터키 제국의 세력이 헝가리에서 물러난 뒤 약 300년간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통치 하게 되었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독립전 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년) 여왕의 통치 시기부터 는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화 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스만-터키 제국의 침략 으로 황폐화되었던 헝가리의 경제는 점차 회복되었 으며, 서유럽의 발전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미술과 음악, 문학 분야도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후 지식인 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지속되자 1867년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다. 이 시 기에 헝가리는 지금의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 마니아를 아우르는 영토를 가지게 되었으며, 국민 총생산이 3배로 증가하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비 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동맹국에 가 담해 패전국이 된 헝가리는 1920년 트리아농(Trianon) 조약을 맺으며 국토의 70%를 잃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에서도 패전국이 되면서 공 산화가 되었다. 1956년에는 스탈린 독재에 저항하 는 민중운동으로 많은 시민들을 잃기도 하였으나, 1988년 대립 세력 사이의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민 주화되었다(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PMK], 2013).
III.The Transition of the Hungarian Men’s Costume
1.The Hungarian men’s costume before the 18th century
헝가리 최초의 역사는 A.D. 896년 알파드(Árpád) 의 지휘하에 마자르인(Magyars)이 카르파티아 분지 (Carpathian basin)를 통하여 현재의 러시아 남부 스 텝 지역인 헝가리에 정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헝가리 복식은 마자르인의 영향으로 동양과 서양의 복식이 혼합된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 마자 르인의기본복식은기마민족이즐겨착용한카프탄과 바지, 부츠로 구성되었다(Földi-Dózsa & Kralovánszky, 1994).
모피 장식을 선호하고, 우수한 가죽 무두질 가공 기술을 보유했던 마자르인은 가죽모자를 착용하고, 납작한 가죽 끈으로 바지 아랫부분을 동여맴으로써 다리를 보호하였다. 하층계급의 농민들은 주로 마직 물로 된 의상을, 겨울에는 두꺼운 펠트로 된 의상을 착용한 반면에, 가장 큰 힘을 가진 기마병은 실크와 금사로 문양이 들어간 브로케이드로 된 의상을 착 용하였다. 마자르인의 투구는 가죽을 봉제하여 제작 함으로써 가벼웠고, 고깔형 가죽 모자와 겨울용 코 트는 모피로 가장자리에 장식되었다.
마자르인의 복식 중 가장 인상적인 아이템은 금 과 은 세공품이 달린 화려한 가죽 벨트로서 헐렁한 의상을 허리에서 묶음으로써 의상의 매무새를 정리 해 줄 뿐만 아니라, 동양 스타일의 휘어진 칼, 금으로 된 약통, 활통, 난방기구를 찰 수 있게 하였다. 마자 르인의 헤어스타일은 세 가닥의 긴 “포니테일(pony tails)” 스타일로 정수리 부분에 한 가닥과 관자놀이 양옆에 두 가닥을 끈이나 금속제 고리로 묶어 늘어 뜨렸다. 이러한 이교도적인 헤어스타일은 종교적인 이념을 넘어 12세기와 13세기에 게르만 국경 지역 까지 전파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시골 특히 목 동들의 독특한 헤어스타일로자리잡았다(Metropolitan Museum of Art [MMA], 1980).
10세기에 이르러 헝가리 민족의 경제적·사회적 환경은 유목 농경에서 정착 농경으로 급격하게 변 화했다. 마침내 헝가리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게저(Géza) 군주 아래 최초로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 으며, 최초의 기독교인 왕인 이슈트반 1세(István Ⅰ, 재위997~1038년)가게저의뒤를따랐다(NPMK, 2013).
기독교 국가로 거듭난 헝가리의 복식은 서유럽과 비잔틴의 패션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슈트반 1세 의 죽음 이후 비잔틴의 영향력이 보다 강해졌다. 이 로써 11세기 중반 상류 계급은 긴 소매의 셔츠 형태 의 의상과 버클이 달린 망토를 착용하였고, 그에 비 해 농민과 극소수 귀족만이 뾰족하고 모피가 장식 된 가죽모자와 카프탄을 착용함으로써 이러한 변화 속도가 늦었다. 이 당시의 직물은 리넨과 마직물이 각 지역에서 생산되었고, 광폭(廣幅)의 직물은 벨기 에의 겐트(Ghent)와 이프르(Ypres) 지역에서 수입하 였다. 진홍색(scarlet) 의상은 비잔티움에서, 실크와 다마스크는 이탈리아의 루카(Lucca)와 밀라노, 플로 렌스 그리고 동양으로부터 수입하였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마티아스 코르비누 스(Matthias Corvinus, 1459~1490년) 왕의 등장과 함 께 나폴리 왕의 딸 베아트릭스(Beatrix)와 결혼한 마 티아스는 당시 매우 진보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 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헝가리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헝가리인들이 가장 선호한 이탈리아 스타일 중 하나가 바로 셔츠이다. 이것은 곱고 하얀 리넨 소 재로 넓은 소매부분에 화려한 자수가 놓이고, 하이 칼라(high collar)가 달렸다. 젊은 남성들은 셔츠 소 매의자수를보다잘보이게하기위해소매의팔꿈치까 지 절개한셔츠위에타이트한 웨이스트코트(waistcoat) 를 착용하였다. 이는 헝가리 남성복식의 원형으로서 재킷인 돌만(Dolman), 외투에 해당하는 멘테(Mente), 꼭 끼는 바지, 부츠로 그 맥을 잇고 있다.
헝가리 남성복식의 가장 전형적인 아이템인 돌만 은 르네상스시대 이후 웨이스트코트를 대체한 앞여 밈의 몸에 꼭 맞는 의상으로서, 이 의상은 작고 둥근 스탠딩(standing) 칼라가 달인 독일 스타일의 셔츠와 비슷하면서도 앞이 오픈되고, 허리 아래가 오버랩 된 카프탄처럼 재단되었다. 현대 소매 용어로도 사 용된 이 재킷의 소매는 바디스의 옆솔기와 소매 아 래 솔기가 연결된다는 점이 패턴상에서 중요하다. 17세기 말의 돌만은 허벅지와 무릎 중간까지 길어 졌으며, 궁정, 국가 축제기간 동안 착용되었다. 발목 까지 내려오는 긴 돌만은 당시 터키의 지배하에 터 키황제를 방문할 때 착용되었다.
돌만 위에 착용된 멘테는 프랑스의 망토(manteau) 에서 그 어원이 유래한다. 헝가리의 역사학자인 피 터 아포르(Péter Apor, 1676~1752) 백작은 동방의 카프탄과 르네상스 시대의 코트가 혼합된 이 의복 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매우 화려한 멘테는 등 중간과 팔꿈치 길이, 가 슴을 덮는 커다란 칼라가 달린 긴 의복으로서 2개의 소매가 바닥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간혹 소매 를 걷어 올려 스티치로 고정하기도 하였다.”
16세기 멘테는 정강이까지 길어서 벨트를 매어 자락을 올리지 않으면 걷기에 위험하여 17세기 이후 승마용의 짧은 멘테가 일반화 되었다(MMA, 1980).
<Fig. 1>은 17세기 헝가리 귀족남자의 초상화로 서 고깔형에 모피로 장식된 모자와 짧은 소매의 재 킷에 자수 놓인 소맷부리가 넓은 셔츠, 다리에 꼭 밀 착된 바지와 발목길이의 부츠를 착용하고 있다. 이 귀족 남성의 돌만은 현재 헝가리 국립박물관에 소 장 중인 조지 반피 백작의 돌만을 도식한 <Fig. 2>에 서 그 구성적 특징을 짐작할 수 있으며, <Fig. 3>의 동시대 서유럽 귀족의 더블릿과 비교했을 때 바디 스 부분은 유사하지만, 서유럽의 더블릿이 허리선에 페플럼이 달린 것에 비해 헝가리의 돌만은 바디스 와 연결되어 있고, 좁은 스탠드 업 칼라는 뒤중심 부 분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Fig. 2>의 구성을 보면 좌임(左袵)에 오른쪽 앞판 (C) 앞중심의 허리선 아래부터 사선으로 재단되어 있고(승마 시 허리 아래부분이 벌어짐을 방지하기 위한 재단으로 사료됨), 왼쪽 앞판(A) 앞중심은 일 직선이고 오른쪽 앞판보다 전체적인 품이 더 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허리 아래 옆선은 사선으로 재 단되어 있고, 허리 옆선에서 아래로 다트가 있다. 이 는 앉았을 때 옆선의 라인을 입체적으로 살리기 위 한 재단 방법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바디스의 직각 암홀라인은 소매(D)에서 볼 수 있듯이, 수평에 가까 운 소매산에 겨드랑이 부분을 직각으로 구성하여 팔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하였고, 소매 끝으로 갈수 록 좁고 손등을 덮을 수 있는 커프스형(청대 마제수 [馬蹄袖]와 유사)은 위로 젖힐 수 있고, 손이 들어갈 수 있도록 트임이 있다.
이외에 다리에 꼭 밀착된 바지, 부츠형 신발 등 을 통해 북방 기마민족 계통인 헝가리 남성복식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넓은 소매에 화려한 자수 와 스탠드형의 조끼 스타일은 <Fig. 4>의 현대 헝가 리 남자 민속복식에도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헝 가리인의 민족적 특성이 현대에도 전승되고 있음 (Harrold & Legg, 1999)을 확인할 수 있다. <Fig. 5> 는 황금색 잎과 튤립 문양을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 한 17세기 헝가리 귀족의 신발로서, <Fig. 1>의 신발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2.The Hungarian men’s costume in the 18th century
1541년 오스만-터키 제국이 헝가리의 통치 중심 지인 부다(Buda)를 점령한 이후 셋으로 분리된 헝가 리는 169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움으 로 오스만-터키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지 만,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 다. 1722~1723년 헝가리 의회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계승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계 여자도 가능 하게 한 것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는 오스트리 아와 헝가리 왕국, 그리고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을 반드시 겸해야만 한다는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헝가 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18세기 헝 가리 귀족은 1740년부터 1780년까지 통치한 합스부 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을 적극 지원함 으로써 중세부터 누려온 봉건귀족의 특권뿐만 아니 라, 그들의 문화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Lee, 1996). 이는 헝가리에 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포용 정책으로서 헝가리 복식의 원형이 유지될 수 있었 던 계기가 되었고, 1848년 이후 헝가리 독립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헝가리 복식은 민족성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착용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Fig. 6>에 표현된 복식을 통 해 파악할 수 있다. <Fig. 6>은 1741년 헝가리 의회 에서 헝가리 민족복식을 착용한 헝가리 귀족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을 묘사한 장면으로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복식은 꼭 맞는 바디스와 긴 소매, 둥글게 부풀린 스커트로 구성된 스타일은 당시 로 코코 스타일에서 벗어나는데, 이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헝가리 귀족들의 복식을 통해 그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다.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자수가 놓인 돌 만, 멘테, 호화스러운 멘테 잠금장식(Fig. 7), 꼭 맞 는 바지와 부츠는 전형적인 헝가리 남성복식으로서 헝가리 귀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한 헝가리적인 복 식 스타일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유사한 경향은 174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 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다섯 자녀들이 등장하는 초 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좌측의 마리아 안나 공주를 제외한 네 명의 왕자와 공주가 헝가리 민족 복식을 착용한 모습이 이례적이다. 이는 헝가리 귀 족들의 신임을 얻는 동시에 여왕의 자손이 헝가리 의 왕위 계승자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 에서 비롯된 것이다(NPMK, 2013).
이상의 자료를 통해 본 18세기 헝가리 남성복식 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복식을 통해 민족 적 자존감을 표시하는 동시에 이민족을 포용하는 도구로서 복식이 사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의 시대상을 복식을 통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 헝가리 남성복식에 가장 큰 변천요인은 트랜실바니아 공국의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인 라코 치 2세(Ⅱ.Rákóczi, Ferenc)가 주도한 독립투쟁(1703~ 1710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강하게 압박하였 고, 결국 무위로 종결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독립 투쟁 후 라코치 2세가 이끌었던 부대의 전투복이었 던 짧은 돌만 스타일은 궁정 남자복식의 기본이 되 었다. 이는 헝가리 기병 제복 스타일로서 전투에 적 합하도록 17세기보다 짧고 몸에 꼭 맞는 스타일로 변한 것이다. 특히 단추를 대신한 화려한 매듭장식 은 장식 효과뿐만 아니라, 칼에 의한 부상을 줄일 수 있게 하였다. 헝가리 기병복식에서 유래한 이 화려 한 제복 스타일은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였다. 독립투쟁에서 패배한 라코치 의 군대는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일부 는 프랑스에서 외인 기병부대를 창설하였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의 친위부대의 제복을 헝가리 기병 제복 스타일로 교체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초반의 돌만은 몸에 꼭 맞으면서 허벅지 중간 길이로 재단 되었다. 멘테 또한 몸에 꼭 맞았는데 두 의상의 매듭 장식은 이전보다 화려해졌고, 정교한 금은 자수가 매우 유행하였다(MMA, 1980).
<Fig. 8>은실크다마스크소재에보빈레이스(bobbin lace)와 코드(cord)로 장식된 1743년 조셉 2세의 멘 테와 돌만의 실제유물사진이며, 단추와 코드 루프로 여미는 좌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Fig. 12>는 조 셉 2세의 멘테와 돌만의 도식화와 패턴이다. 의상의 구성적인 면을 보면 멘테의 경우 오른쪽 앞판(C)은 중심선이 허리선까지 일직선으로 내려오다 허리선 에서 바깥쪽으로 꺾이면서 확대되고 있으며, 왼쪽 앞판(A)는 오른쪽 앞판보다 전체적인 품이 넓고 소 매에 손등을 덮을 수 있는 커프스 형태가 연결되어 있다. 뒤판(B)은 한판으로 재단되어 있고, 좁은 스탠 딩 칼라는 강하게 굽어져 있다. 돌만의 경우는 멘테 처럼 왼쪽 앞판(F)이 오른쪽 앞판(H)보다 전체적인 품이 넓지만, 오른쪽 앞중심선이 일직선으로 내려오 다 허리선 아래에서 급한 경사의 사선으로 재단되 었고, 왼쪽 앞판은 앞중심선이 허리선까지 볼록 나 오면서 허리 아래에서 약한 경사의 사선으로 재단 되었다. 그리고 소매와 칼라는 멘테의 구성과 유사 하다. 이 의상은 17세기 돌만과 비교했을 때 직선의 암홀라인이 곡선으로, 바디스 부분이 몸에 더 밀착 되면서 허리 아래에서 넓게 퍼지고, 허리 옆선에 있 었던 다트는 사라지고 선으로 대체되었다. 스탠딩 칼라는 뒷목부분이 높은 일자형에서 목을 감싸는 칼라 폭이 일정한 라운드형으로, 소매는 소매산 부 분이 높아지면서 타이트하게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Fig. 9>
<Fig. 10>은 1770년 트랜실베니아 지방의 대법관 사무엘 백작의 실제 유물사진으로서, 무릎길이에 긴 소매가 부착된 모피 트리밍된 멘테와 힙길이에 긴 소매가 부착된 돌만은 담자색(淡紫色)의 두둑이 있 는 실크소재에 금사와 시퀸(sequin)으로 자수가 놓 여 있고, 이들 의상 또한 단추와 코드 루프로 여미는 좌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Fig. 13>은 사무엘 백 작의 멘테와 돌만의 도식화와 패턴으로서, 1743년 조셉 2세의 멘테와 돌만과 비교했을 때 멘테의 경우 앞판 좌우가 동일하며, 앞중심은 허리선까지 볼록하 고, 허리선 아래는 일직선이다. 그리고 옆선이 뒤판 쪽으로 이동되어 있으며, 허리에 라인을 넣어 허리를 보다 잘록하게 재단하였고, 소매산은 보다 높아지면 서 이전보다 타이트하면서 손등만을 덮는 형태에서 커프스 형태로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Fig. 11-12>
돌만의 경우는 여전히 왼쪽 앞판(E)의 품이 넓으 며, 옆선은 멘테처럼 뒤판쪽으로 이동되어 있다. 그 리고 앞판의 암홀 라인 겨드랑이 부분에서 아래로 선이 들어가고, 허리선 아래 골반부분에서 이전 돌 만보다 약한 경사의 사선으로 재단되었다. 소매는 소매산이 보다 높아지면서 손등을 덮는 부분이 사 라지고, 뒷목부분이 다소 높은 스탠딩 칼라의 형태 로 재단되었다.
18세기 멘테와 돌만의 변천을 살펴보면 돌만의 변화 양상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전 17세기 에 비해 돌만은 전체적으로 보다 타이트해지고, 18 세기 초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돌만의 길이가 짧 아지고 타이트해지면서 소매의 손등을 덮는 부분이 일자형 커프스형태로 변화하고, 오른쪽 앞판 부분의 허리선 아래 사선으로 경사진 부분이 점차 경사가 작아지고 있음을 <Fig. 8>~<Fig. 11>의 시기별 의상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The Hungarian men’s costume since the 19th century
19세기에 접어들자 합스부르크 제국은 제국 내 소수민족들의 저항이 구체화되었는데, 특히 헝가리 에서는 1848년 헝가리 시민혁명과 1849년 독립전쟁,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라는 일련 의 사건들(Kim, 2009)을 통해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1848~1849년의 헝가리 시민혁명과 독립전쟁 이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러시아 차르의 군대에 의 해 제압됨으로써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헝가리는 시민 혁명과 독립전쟁을 통해 코슈트(Kossuth, L), 페퇴피 샨도르(Petőfi, Sándor) 등 수많은 민족영웅을 탄생 시켰고, 합스부르크의 피의 보복으로 새로이 수많은 민족적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지속된 헝가리인들의 반합스부르크적 태도 와 독립전쟁을 신성시하는 움직임을 낳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Lee, 1996).
1848년 혁명 이래 헝가리측이 계속해서 요구해 오 던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한다는 대타협(Ausgleich) 안이 1867년 통과되면서 유럽 역사에 있어서 전대 미문의 이중제국이 형성되었다. 대타협안은 도나우 강의 지류인 라이트 강(Leithar River) 서쪽은 오스 트리아 제국, 강의 동쪽은 헝가리 왕국으로 두 국가 의 관계는 표면상으로 평등한 권리를 기초로 하여 각각의 독립적인 입법부와 행정부를 갖고, 각각의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주권국이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독 자적인 주권을 보유한 2개의 개별 왕국이 1명의 군 주를 정점으로 하여 하나의 국가 형태를 취한 것으 로서 이중제국은 자체 내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도 외시하고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국가로서의 통일성 과 동질성이 결여된 채 수많은 내적 갈등요인과 모 순상을 내포하고 있었다(Park, 2006). 이러한 시민혁 명과 독립전쟁, 이중제국 형성이라는 일련의 사건들 은 헝가리인들의 민족적 자존감과 민족의식을 보다 강하게 고취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이는 헝가리 민족복식을 통해 외부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와 더불어 19세기 서유럽은 1815년 나폴레옹 제국의 붕괴,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왕정체제 로 복귀하고, 낭만주의 사조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경향과 맞물려 서유럽 남자복식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아워글라스형의 전형적인 로맨틱 스타일이 유행하였는데(Chung, 1997), 이러한 스타일은 헝가 리 남성복식에 영향을 미쳤음을 아래의 유물자료들 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Fig. 14>는 1867년 헝가리 남성복식으로서 착용 하고 있는 멘테는 1850년 페렌츠 백작의 멘테(Fig. 19)와 유사하다. 페렌츠 백작의 멘테의 도식화와 패 턴을 보면 이전 멘테처럼 앞판 좌우가 동일하고, 뒤 판은 프린세스라인으로 허리를 잘록하게 구성하였 지만, 옆선은 일직선으로 하여 정면에서 볼 때는 H 라인으로 보인다. 소매는 18세기보다 짧아지고, 소 매 중심부분에 트임이 생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Fig. 15>는 화려하게 자수된 실크 소재에 금사로 된 매듭장식과 마노(agate, 瑪瑙) 단추가 달린 19세기 후반의 돌만으로서, 18세기 라코치 2세가 이끌던 부 대의 전투복 스타일과 비교했을 때 허리가 보다 잘 록해졌고, 보다 장식적인 디테일이 가미되었다. <Fig. 20>은 1840년대 돌만의 도식화와 패턴으로서 18세 기와 달리 앞판 좌우가 동일하고, 허리에서 절개되 어 있다. 앞판은 허리선 옆에서 가슴 부분을 향하는 다트가 있고, 뒤판은 프린세스 라인으로 허리를 잘 록하게 구성하고 있다. 허리 아래 부문은 앞뒤판이 연결되어 있고, 뒤중심에 맞주름이 있다. 소매는 팔 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만들기 위해 팔꿈치 아래 부 분이 전방으로 굽어지도록 재단되었고, 스탠딩 칼라 는 이전과 동일하다. 이는 <Fig. 15>의 돌만과 매우 흡사해 보임으로써, 19세기 초중반 스타일이 후반 까지 유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Fig. 16-17-18>
20세기로 접어들면 19세기에 허리를 잘록하게 했 던 아워글래스 스타일이 사라지고, <Fig. 16>과 <Fig. 17>처럼 자연스러운 허리라인으로 복귀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외 <Fig. 18>의 바지는 이전 사용되었던 오프닝으로 사용되었던 허리 좌우의 르퐁(le pont) 이 사라지고, 자수장식만 남은 채 앞 중앙에서 단추 로 여미는 형태로 바뀌었다.
<Table 1>은 헝가리 남성복식 중 복식 변천이 뚜 렷하게 확인되는 멘테와 돌만을 중심으로 바디스, 칼라, 소매의 변천과정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정리한 표로서 헝가리 남성복식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IV.Conclusion
A.D. 896년 알파드(Árpád)의 지휘하에 마자르인 (Magyars)이 카르파티아 분지(Carpathian basin)를 통 하여 현재의 러시아 남부 스텝 지역인 헝가리에 정 착함으로써 시작된 헝가리의 역사는 1241년 몽고의 침입과 1541년 오스만-터키 제국이 헝가리 일부 지 역을 점령, 169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움으로 오스만-터키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 었지만,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역사적 특수성은 헝가리 복식의 변천과 연관 이 깊다.
이상에서 살펴본 헝가리 남성복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그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남성복식 의 변천과정은 크게 18세기 이전과 18세기, 19세기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8세기 이전 헝가리 남성복식은 9세기 헝가리에 정착한 마자르인의 복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마민 족이었던 마자르인의 기본 복식은 카프탄과 바지, 부츠로 구성되었다. 10세기 이후 유목농경에서 정 착농경으로 변화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서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기존 마자르 인의 복식 스타일과 서유럽 복식 스타일이 결합한 헝 가리 남성복식의 원형인 돌만(Dolman), 멘테(Mente), 바지, 부츠로 구성된 스타일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 중 돌만은 동시대 서유럽 귀족의 더블릿과 비교했 을 때 뒤중심 부분이 높은 스탠딩 칼라, 좌임(左袵) 에 오른쪽 앞판 중심의 허리선 아래부터 사선으로 재단, 왼쪽 앞판 중심이 일직선이고 오른쪽 앞판보 다 전체적인 품이 더 넓음으로써 서유럽 남자복식 과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이는 유목 기마민족 복식 의 요소를 그대로 계승한 헝가리 복식의 특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특수성은 16세기와 17 세기에 걸친 오스만-터키 제국이 헝가리 일부지역 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169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도 움으로 오스만-터키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났지만, 합스부르크의 압제에 놓이게 된 사건을 계기로 18 세기 헝가리 남성복식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압제 하에 1703년부터 1710년까 지 라코치 2세가 주도한 독립투쟁은 헝가리 남성복 식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라코치 2세가 이끌 었던 부대의 전투복이었던 짧은 돌만 스타일이 궁 정 남자복식의 기본 복식이 됨으로써 18세기 남자 복식의 특징적인 스타일로 정착되었다. 독립투쟁 이 후에도 1740년부터 1780년까지 통치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궁정 내에서 헝가 리 복식을 수용함으로써 이민족을 포용하는 도구로 서 복식을 사용하였고, 헝가리 민족은 복식을 통해 민족적 자존감을 표시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상을 복 식을 통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이후의 헝가리 남성복식은 1848년 헝가 리 시민혁명과 1849년 독립전쟁, 1867년 “오스트리 아-헝가리 이중제국”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시민혁명과 독립 전쟁, 이중제국 형성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헝가리 인들의 민족적 자존감과 민족의식을 보다 강하게 고취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이는 헝가리 복식을 통해 외부적으로 표출되었다. 이와 더불어 19세기 초반 서유럽에서 유행하였던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 간 아워글라스형의 전형적인 로맨틱 스타일이 헝가 리 남성복식에 영향을 주었고, 20세기로 접어들어 19세기에 허리를 잘록하게 했던 스타일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허리라인으로 복귀되었다.
이상과 같이 헝가리 남성복식은 기마민족이었던 마자르인의 복식인 카프탄과 바지, 부츠를 기반으로 10세기 이후 서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서 기존 마자르인의 복식 스타일과 서유럽 복식 스 타일이 결합한 헝가리 남성복식의 원형인 돌만, 멘 테, 바지, 부츠로 구성된 스타일이 정착하게 되었다. 특히 헝가리 남성복식은 이민족에 대한 저항과 투 쟁, 침략과 피지배의 역사 속에서 민족적 자존감으 로 표출되었고, 이는 헝가리 남성복식의 변천과정에 서 중요한 변천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