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Introduction
현대복식의 원형이 되는 서양복식에 대한 역사 즉 서양복식사는 주로 왕과 귀족 중심의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러한 복식사적 기록은 상류계층의 전유물이었던 회화나 조각과 같은 다양한 예술작품에 묘사된 모습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류계층에 비해 아무 벼슬이 없는 평민, 귀족이 아닌 보통 사람, 중류 이하의 넉넉 지 못한 백성을 지칭하는 일반 서민(“Populace”, 2022) 들의 경우 이러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서양복식사라 하면 서양 상류계층 복식의 역사라는 지 배계급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의 필요성을 토대로 서민복식과 관련 한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17~18세기 프랑스 사회적 신 분 및 계층분류에 의한 서민복식의 범위를 규정하고 그에 따른 복식 유형의 차이와 변화에 대한 분석 연구 (Kim & Kim, 2012)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 나타 난 시민복식을 복식 의장학 요소에 근거하여 아이템 별로 분석하고 시민복식에 내재된 17세기 네덜란드인 들의 조형미를 고찰한 연구(Yoo & Cho, 1999), 18세 기 프란시스 데 고야의 회화에 나타난 스페인 서민복 식의 상향전파 사례연구(Bae, 2018), 18세기 후기 프 랑스 여자 서민복 꺄라꼬(caraco)와 쥐뽕(jupon) 고증 및 디자인 연구(Kim, Bae, & Ryu, 2019), 서양복식사 를 중심으로 한 근세 서민복식에 대한 연구(Han, 1999) 로 관련 연구가 매우 미진한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는 16세기 네덜란드의 대표 화가인 피 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5~69)의 회화 작품을 중 심으로 당시 네덜란드의 사회적․예술적 배경과 작가 의 예술세계를 고찰한 후 르네상스 시대 서민 남자복 식의 아이템별 유형과 특징 그리고 당시 귀족복식 유 형과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르네상스 복식사 연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에서 피터 브뤼겔의 회화 작품을 한정적으로 선 택한 이유는 16세기 당시 르네상스 서민복식을 사실 적으로 묘사한 화가가 바로 피터 브뤼겔이며, 다른 회 화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방법으로는 문헌자료와 시각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문헌자료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역사와 예술사, 복식 관련 서적과 논문 등을 활용하였고, 시 각자료로는 2018년 비엔나 쿤스트히스토리시스 박물 관(Kunsthistorisches Museum)에서 발행한 피터 브뤼 겔 전시회 도록(Oberthaler, Pénot, Sellink, Spronk, & Hoppe-Harnoncourt, 2018)에 수록된 회화작품 120점 중에서 서민복식이 가장 잘 묘사된 인물 중심의 작품 48점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연구범위는 16세기 네 덜란드 서민 남자복식에 한정하여 당시 유럽의 르네 상스 시대 귀족 남자복식과 구별되는 특성을 파악하 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Ⅱ. Theoretical Background
1. Dutch social and artistic background in the 16th century
네덜란드는 고대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부 터 끊임없이 주변국의 지배에 시달려 왔으며, 14세기 에는 프랑스,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 가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에는 유럽의 최대 강국이 었던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1588년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Lee et al., 2002). 브뤼겔이 활동한 시기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하에 플랑드르(Flanders, 북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 걸친 지역) 르네상스의 전 성기와 일치한다. 16세기 대부분 동안 네덜란드는 막 대한 물질적 번영을 만끽했다. 농업, 상업, 그리고 특 히 상업은 전 유럽의 부러움을 살만큼 전례 없는 부를 창출했다.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Charles V, 1500~ 1558)가 아들인 펠리페 2세(Philip Ⅱ, 1527~1598)에 게 스페인 왕위를 물려준 지 4년 후인 1559년, 베네 치아 대사는 스페인 제국의 진정한 광산은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라 네덜란드 습지임을 정확히 지적했다. 이탈리아 금융가이자 역사가인 루도비코 기차르디 니(Ludovico Guicciardini)는 1567년 안트베르펜 (Antwerpen)에서 출판된 『네덜란드 지리서 Description of All the Lowlands』에서 네덜란드의 융성을 생생히 묘사했다. 네덜란드는 12,000개의 마을과 200곳 이상 의 성벽도시가 있어 유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Gibson, 2001/1977).
1560년 기록에 의하면 무역 항구를 보유하고 금융 의 중심지인 안트베르펜은 도시인구 15만 명으로 이 곳에 등록된 화가의 수는 360명에 달하였다. 당시 대 부분의 화가들 임무는 공방에 소속되어 책 인쇄와 소 형 팜플렛, 선전문구를 위한 판화용 밑그림 제작이었 다. 이탈리아 화가들이 거대한 성당의 천정화나 벽화 를 제작하는 데 비하여 네덜란드 화가들은 작은 책자 의 밑그림 제작에 몰두하였다(Yoo, 1992).
16세기 북유럽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종교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유럽의 개 신교회로부터 모든 성화와 조각이 제거되었고 반면 성화를 제외한 미술, 즉 16세기 초 판화작품을 통하 여 독립된 장르로서 등장한 풍경화, 정물화가 개혁교 회의 뿌리를 내린 네덜란드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Harbison, 2001/1997).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 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 란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 술가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경에서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 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 을 전문화하였다. 일찍이 반에이크(Van Eyck, 1370?~ 1426)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 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Gombrich, 1999/1995). 이러한 경향은 북유럽에서 미술작품의 제작에서 물리적인 기술을 강조함으로써 미술작품이 거의 한결같이 일정한 수준의 정확성을 갖추게 되었 다. 이것은 또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 로 그림에서 사회적인 계급을 구분하거나 지위를 파 악할 수 있게 한다. 북유럽의 미술가들과 후원자들은 자신들이 위치한 현재의 혹은 잠재적인 사회적 위치 를 상세하게, 그리고 사소한 부분까지 자각하고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북유럽 미술가들은 자신들 시대에 대해 적극적 의사를 표현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 치적, 종교적 혹은 사회적 변화의 중요한 통로라고 생 각했다. 그들의 작품은 동시대인들의 문제와 사상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북유럽에는 변 동성과 불확실성이 있는데, 이 점은 이탈리아 르네상 스의 전형인 불변성과 기념비적으로 안정된 형태와 대조된다(Harbison, 2001/1997).
2. Pieter Bruegel’s world of work
피터 브뤼겔은 북유럽 회화의 전통을 이은 플랑드 르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가장 주도적인 인물 이었다. 그는 당대의 마을, 시골사람, 축제와 성인(聖 人)들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았다. 그의 그림은 전기 낭만주의풍의 상상력과 매혹으로 가득한 자연을 배경 으로 했다. 그 자연은 고립되고 동떨어진 세상을 나타 내며, 이탈리아 고전예술이 표방하는 종합, 균형, 형 식적 안정감을 보여주는 자연과는 다르다. 브뤼겔이 창작에 몰두하던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명성을 떨치고, 팔라디오와 티 치아노가 활동하던 시대였다. 이탈리아 회화는 르네 상스의 전성기에 이르러 그 산물인 마니에리즘 (mannerism)이 싹트고 있었다. 또한 엄격한 선(線)의 시대로 완벽과 균형이 추구되고, 인간이 예술 속에 놀 라울 정도로 승화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 으로 당시 북유럽 회화는 기괴하면서도 인간적인 세 계에 상징적인 의미와 현실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동 시대인들과 역사학자, 비평가들에 의하면 브뤼겔은 농부이자, 부르주아, 위선적 신앙인, 난봉꾼, 민중들의 초상화가, 풍경화가, 풍속화가이며, 정교하면서도 상 징과 은유로 가득한 해석학적 장치를 만든 세련된 인 문주의자이기도 했다(Allegretti, 2010/2004).
이러한 브뤼겔의 특징적인 면모는 당시 사람들의 삶과 놀이문화를 표현한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Fig. 1)”에 잘 나타나 있다. 1559년에 그려진 이 그림 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상단 교회 건물에서 왼쪽 대 각선 아래에 위치한 사순절을 상징하는 고난과 희생 의 이미지인 수녀와 수도사까지 선을 그었을 때 오른 쪽은 사육제, 왼쪽은 사순절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2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으며, 복식의 형태를 보면 대부분 일반 서민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의 등 장인물들은 신체적 특징과 복식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화가가 인간에 대해 세심하게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로서 당시 일반 서민복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Ⅲ. Dutch Populace’s Costumes Depicted in the Paintings by Pieter Bruegel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시대 남자들은 속에 슈미즈 (chemise)를 입고 그 위에 더블릿(doublet)을 입었으 며 그 위에 저킨(jerkin)을 겹쳐 입기도 하고 아래는 호즈(hose)를 입었다. 중기 이후 호즈는 윗부분이 양 파 모양의 바지인 트렁크 호즈(trunk hose)로 되고, 후 기에는 베네치안(venetians)이라는 품이 넓은 반바지 가 나왔으며, 맨 겉에는 소매가 달린 가운이나 케이프 를 입었는데, 이러한 것은 현대 남성 복장에 좀 더 가 깝다고 할 수 있다. 남자들의 겉옷은 어깨를 강조하여 심을 넣거나 퍼프를 만들어 볼륨 있게 어깨를 넓히고 가슴을 볼록 나오게 과장하여 남성미를 나타냈으며, 다리에는 꼭 맞는 호즈를 신고 심을 넣어 돌출시킨 코 드피스(codpiece)는 16세기 남자 복식의 그로테스크 한 면을 나타내준다(Shin, 2006).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피터 브뤼겔의 회화에 표현된 16세기 서민 남자복식을 중심으로 기존 서양 복식사의 주류인 귀족 남자복식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자 한다.
1. Upper garment
1) Chemise
르네상스 남자들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계속 입어 온 언더튜닉인 슈미즈(Shin, 2006)를 더블릿 속에 착 용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귀족들의 슈미즈는 대개 네 크라인에 프릴이 달리고 네크라인부터 어깨선까지 많 은 주름이 잡혀 품이 상당히 넓고, 길이 또한 무릎까 지 긴 경우가 많다. 소매의 경우 소매산 부분에 주름 이 많이 잡힌 통이 넓고 소매 부리에 프릴이 달린 디 자인이 유행하였다(Chung, 2010). 이에 비해 추수 후 낮잠을 자는 네덜란드 서민 남자의 슈미즈(Fig. 2)는 네크라인이 넓게 파져 있고 품 또한 넓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소매 또한 그리 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Fig. 3>의 말 장수의 경우 네크라인을 보면 더블릿 위로 슈미즈의 프릴이 표현되어 있고, 소매 부리의 경 우 팔짱을 끼고 있어서 프릴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 다. 그러나 말 장수 외의 다른 그림에서는 주로 더블 릿에 가려져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우나 대부분 네크 라인과 소매 부리에 프릴이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확 인된다.
2) Doublet
르네상스 시대 남자들의 대표적인 상의 중 하나가 더블릿이다. 귀족들의 더블릿은 국가별로 다소 차이 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패드를 넣어 부피를 크게 함으 로써 남성미가 강조되었다.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볼 록하게 나온 피스카드벨리(peascod-belly), 앞중심 부 분을 여미기 위한 수십 개의 화려한 보석단추들, 소매 를 따로 구성하여 상체의 진동에서 끈이나 단추로 결 합시킨 부분을 미화하기 위해 다른 천으로 작은 날개 처럼 만들어 소매산을 가린 에폴렛(epaulette), 바지와 연결된 허리선 부분을 장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모양 의 페플럼(peplum), 여러 가지 모양으로 찢은 슬래시 (slash)는 귀족들이 착용했던 더블릿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Chung, 2010). 이에 비해 네덜 란드 서민들의 더블릿은 <Fig. 3>과 <Fig. 4>와 같이 패드를 넣지 않아 바디스와 소매 부분이 전반적으로 여유 있고, 소매 부리는 활동성을 고려하여 좁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소매와 암홀 부분은 탈착이 아닌 봉 제로 고정되어 있어서 에폴렛은 보이지 않고, 허리선 아래의 페플럼의 경우, <Fig. 3>에서는 앞부분에는 주 름이 없고 옆에서 뒤중심까지 주름이 있는 페플럼이 부착되거나, <Fig. 4>처럼 별도의 페플럼 없이 더블릿 의 길이를 힙 라인까지 연장하기도 하였다. <Fig. 5>에 서도 힙선 길이의 더블릿을 볼 수 있는데 뒤판 밑단에 트임을 넣어 활동성을 가한 것으로 볼 때 <Fig. 4>의 더블릿 뒤판 밑단에도 트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더블릿의 앞판 여밈 부분을 보면 <Fig. 3>의 더블릿에는 매우 작은 단추로 여미고 있으나 그 외 다 른 서민들의 경우 대부분 끈으로 앞을 여미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는 <Fig. 3>의 말 장수가 당시 고가품인 말을 거래함으로써 일반 서민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더블릿에서 볼 수 있었던 단추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Fig. 4>의 더블릿에서 앞여밈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앞판이 왼 쪽 앞판 위로 올라간 좌임(左衽)의 형태를 보이고 있 는데 <Fig. 7>의 저킨에서는 앞여밈이 우임(右衽)의 형태를 보이고 있음을 감안할 때 상의 앞판 좌우에 똑 같은 아일릿 2쌍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여밈의 방 향은 서민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귀족들의 경우 주로 단추를 사용하였기 때 문에 앞판 오른쪽에 단추, 앞판 왼쪽에 단춧구멍이 위 치해 있기 때문에 우임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소작농의 더블릿 앞자락이 허리선에서 밑단까지 사선 으로 재단된 것이 특이할 만한데, 이는 허리 라인에 끈으로 매듭이 되어 그 아래 부분이 벌어졌을 때 벌어 짐을 최소화하기 위한 재단으로 보여진다.
<Fig. 5>의 더블릿에서는 귀족들의 더블릿에서 볼 수 없었던 후드가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귀족들 보다 야외활동이 많은 서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반 영된 요소라 할 수 있다. <Fig. 6>에서 백파이프를 불 고 있는 남자의 더블릿은 <Fig. 3, 4, and 5>의 더블릿 과 달리 길이가 허리선까지 올 정도로 짧은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더블릿의 오른쪽 측면 밑단 부분을 보 면 2개가 한 쌍인 아일릿(eyelet)이 드러나 있다. 이 아 일릿은 바지와 연결하는 끈이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요 소로서, 귀족들의 더블릿에서 이 아일릿과 끈을 가리 기 위해 사용한 장식적인 페플럼이 전반적으로 길이 가 짧은 서민들의 더블릿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음을 브뤼겔의 회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파이프를 불고 있는 남자를 오른쪽에서 지켜보는 남자가 착용한 짙 은 주황색의 더블릿은 민소매로 슈미즈의 소매가 드 러나 있는데, 이는 귀족들의 더블릿에서 주로 보였던 탈착 가능한 소매가 아닌 처음부터 더블릿이 민소매 로 구성되어 조끼형태의 더블릿으로 착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짧은 더블릿은 <Fig. 7>에서 춤추는 남자가 착용한 더블릿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힙선 길 이의 푸른색 저킨 속에 허리 라인 길이의 짧은 주황색 더블릿이 네크라인과 허리 밑단, 암홀에서 부분적으 로 보여진다. 여기서 소매의 경우 민소매인지 확인되 고 있지 않으나 다양한 환경과 용도적인 측면에서 더 블릿의 소매 유무가 결정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브뤼겔의 회화에서 보여지는 더블릿의 경우 귀족들의 더블릿에 주로 보였던 스탠딩 칼라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점으로 나타난다.
3) Jerkin
르네상스 시대 주로 더블릿 위에 착용하였던 저킨 은 소매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16세기 초기 의 저킨은 네크라인이 V자형이나 U자형으로 많이 파 여 있어 속에 입은 더블릿이 보이고, 앞여밈은 그대 로 터서 입거나 단추나 후크, 끈으로 여몄다. 네모형 이나 둥근 목둘레에는 칼라가 달리지 않았으나 1540 년대에 좁은 스탠딩 칼라가 달린 것이 나왔다. 옷의 길이는 엉덩이길이, 무릎길이, 무릎 바로 아랫길이의 것에서, 1530년 이후부터 길이가 점차 짧아졌다(Shin, 2006).
16세기 네덜란드 서민들의 저킨 또한 비슷한 귀족 들의 저킨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먼저 <Fig. 8>에서 2명의 소작농이 착용한 저킨을 보 면 스탠드 칼라가 달려 있는데, 그림의 제작시기가 1560년부터 1565년 사이인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앞서 언급한 1540년대에 좁은 스탠딩 칼라가 달린 것이 나 왔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어 깨 끝의 소매산 부분에 달린 에폴렛을 통해 이 저킨의 소매가 탈부착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허리 라 인 아래에는 엉덩이길이의 주름이 많은 페플럼이 달 려 있다. 소매가 없는 저킨의 경우 <Fig. 7>의 푸른색 저킨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네크라인이 V자형으로 많이 파져 있어 속에 착용한 주황색의 더블릿이 겉으 로 보인다. 이는 앞서 언급한 저킨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지만 그림의 제작시기가 1566년인 것을 감안할 때 힙선보다 짧은 길이의 더블릿을 보면 1530년 이후 길이가 점차 짧아진다는 트렌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 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Fig. 9>에서 춤추 러 가는 남자가 착용한 검정색 저킨에서 확인할 수 있 는데, 칼라가 없고 힙 라인보다 다소 짧아 속에 착용 한 붉은색 더블릿이 겉으로 보인다. 이 검정색 저킨의 어깨 끝에는 에폴렛이 보이지 않고 매듭 끈 또한 보이 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소매가 몸판에 봉제된 것으로 보 여진다. 춤추러 가는 남자의 왼쪽 편에 멀리 보이는 춤추는 남자의 회색 저킨은 소매가 없고 규칙적인 굵 은 주름이 있는 무릎길이의 긴 페플럼이 달린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페플럼의 형태는 16세기 귀족들의 더블릿 아래 트렁크 호즈 위에 걸치는 무릎길이의 스 커트형 의복인 베이시즈(bases)와 형태적으로 매우 유 사한 것으로 보여짐에 따라, 귀족들의 패션을 서민들 이 차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거의 동일한 저킨은 <Fig. 10>에서 밭을 가는 남자의 저킨에서도 발견되는 데, 이러한 형태의 저킨은 일상복뿐만 아니라 작업복 으로도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Pants
르네상스 시대 하의는 중세 시대의 양말이 변형 되어 바지 형태를 이룬 것으로, 반바지인 브리치즈 (breeches)와 양말 형태인 호즈(hose)로 나뉘어졌다. 브리치즈와 호즈의 앞트임에는 역삼각형의 천으로 주 머니 모양을 만든 앞 덮개천이 있었는데 이 곳의 상단 두 곳을 가는 끈이나 핀으로 바지에 고정시켰다. 이 부분을 코드피스(codpiece)라 불렀는데, 초기에는 단 지 덮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다른 부분이 과장됨으로 써 함께 부피가 증가하였다가 16세기 후반부에 사라 졌다(Lee, Choi, & Choi, 1999).
네덜란드 서민의 바지는 브뤼겔의 회화에서 양말 이 허리까지 올라온 형태의 호즈가 거의 대부분을 차 지하고 있다(Fig. 1, 2, 4, 7, 9, and 10). 호즈의 앞 가 랑이에는 귀족들이 경쟁적으로 크기와 장식에 몰두했 던 코드피스가 달려 있는데, 하물며 농사를 짓는 사람 까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남자들이 코드피스를 부착하였다는 점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먼저 <Fig. 11>에서 누워 있는 남자의 호즈를 보면, 상의인 허리 길이의 짧은 더블릿에 끈으로 연결하여 흘러내림을 방지하고 있다. 호즈의 앞트임은 벌어져 있어 이 또한 매듭 끈으로 묶어 매고 있으면서 코드피 스는 성기가 보일 정도로 느슨하게 묶여져 있다. <Fig. 12>의 경우 술 취한 남자의 호즈를 보면 허리 뒤가 벌 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뒤 밑위길이가 짧 아 앞으로 몸을 구부릴 경우를 고려하여 호즈 뒤 허리 에 있는 매듭끈을 묶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Fig. 13> 에서는 호즈의 앞트임과 코드피스의 부착 형태를 자 세하게 볼 수 있는데, 슈미즈의 밑자락이 앞트임을 가 릴 뿐만 아니라 성기를 보호하는 속옷 역할도 하고 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Fig. 14>는 1567년 죽음을 맞이한 스웨덴 귀족이 착용하였던 브리치즈인 플루더호제(pluderhose) 유물 을 일러스트화한 것(Arnold, 1985)으로, 허리 부분에 일정 간격으로 2쌍의 아일릿과 코드피스의 구성을 이 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매듭 끈이 아일릿을 원활하게 통과하기 위해 매듭 끈의 끝부분에 가죽을 대어 딱딱 하게 만든 포인트가 보인다. <Fig. 15>는 춤추러 가는 남자의 호즈를 확대한 그림으로서 솔기가 뒤중심에 오고 신축성을 위해 사선으로 재단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네덜란드 서민들의 바지로 호즈 이외의 형태 로는 <Fig. 6>의 백파이프를 부는 남자가 착용한 허벅 지 길이의 짧은 브리치즈와, <Fig. 16>의 스케이트 타 는 남자가 착용한 통이 넓은 긴 바지가 드물게 보인 다. <Fig. 16>의 바지는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성을 감 안하여 짧고 꼭 맞는 브리치즈를 변형하여 통을 넓히 고 길게 한 것으로, 허리는 꼭 맞게 하기 위해 여러 개의 주름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3. Wraps
르네상스 시대 외투로는 더블릿이나 저킨 위에 어 깨가 넓고 풍성한 독일풍의 외투를 입거나 스페인식 케이프(cape)가 주로 착용되었다. 외투는 앞을 여미지 않고 벌어지게 하여 속에 받쳐 입은 옷을 드러나 보이 게 하였다(Shin, 2006).
브뤼겔의 회화에 표현된 네덜란드 서민들의 외투 는 <Fig. 17>에서 일렬로 줄지어 서있는 맹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맨 왼쪽에 서 있는 맹인의 외투는 A라 인으로 밑자락이 넓은 코트형에 소매가 달리고 네크 라인에는 좁은 스탠딩 칼라가 달려 있다. 앞여밈의 경 우 칼라 바로 밑에 2쌍의 아일릿을 통해 끈으로 여미 고 있어 움직일 때 아래 부분은 벌어지게 되어 있다. 앞의 두 사람이 착용한 외투는 소매가 없는 스페인식 케이프형으로 칼라와 앞여밈은 맨 왼쪽 사람의 외투 와 같은 스타일이다. <Fig. 18, 19, and 20>은 브뤼겔 의 1566년 작 “세례 요한의 설교”에서 외투를 착용 한 주변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먼저 <Fig. 18>의 구경하는 사람이 착용한 외투는 정강이 길이의 긴 코트형으로, 허리에 벨트를 매어 생긴 주름의 형태 를 보면 품이 상당히 넓고 소매통 또한 넓어서 소매부 리에 커프스(cuffs)를 단 것으로 보여진다. 그 외의 요 소는 <Fig. 7>의 춤추는 남자가 착용한 외투처럼 칼라 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여밈의 경우 춤추는 남자 외 투의 앞판 왼쪽 허리 라인 부분에 발견되는 2쌍에 아 일릿에 달려 있는 매듭 끈이 1개 달려 있는 것으로 볼 때, 구경꾼의 외투 또한 한 개 이상의 끈으로 앞을 여 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형태의 외투는 <Fig. 19>에서 볼 수 있는데 왼쪽 사람의 외투는 <Fig. 18> 의 외투에 비해 품이 적어 밑단 뒤중심 부분에 트임이 있고 네크라인이 넓게 파져 있고, 오른쪽 사람의 외투 는 후드가 달린 코트형으로 보여진다. <Fig. 20>에서 는 등을 돌리고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외투는 15세 기 상류층에서 실내복과 외출복으로 애용되었던 우플 랑드(houppelande)와 유사한 외투를 착용하고 있다. 왼쪽 사람의 외투는 오른쪽 사람과 달리 칼라가 없고 품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뒤에 쭈그리고 앉은 남자의 외투는 수평으로 줄무늬가 있는 케이프를 착 용하고 있으며, 사각형의 플랫 칼라가 달린 것으로 보 인다.
4. Hairstyle and hat
르네상스 시대 남자의 전반적인 머리 모양은 강조 된 상의와 함께 대체로 짧아져 강한 남자의 인상을 느 끼게 한다. 남자의 모자는 둥글고 높은 크라운(crown) 을 가진 얇은 토크(toque), 반원의 칼로트(calotte), 얇 은 보닛(bonnet), 샤프롱(chaperon) 등이 착용되었고,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르러서는 원형의 천을 끈으로 조 여 캡(cap) 모양을 만들어서 머리 위에 얹어 쓴 간단 한 모자인 바레트(barrette)가 가장 유행하였다(Chung, 2010).
브뤼겔의 회화에 표현된 남자들의 머리 모양 또한 르네상스 시대 대표적인 스타일인 뒷목이 보일 정도 로 짧은 머리 모양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자의 경 우 <Fig. 21>부터 <Fig. 44>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유행 한 것을 볼 수 있다. <Fig. 21>과 <Fig. 22>에서는 속모 자 개념의 귀를 덮는 코이프를 착용한 후 그 위에 챙 의 앞부분이 넓은 형태의 모자를 착용하거나 귀를 덮 는 보닛 형태의 모자를 겹쳐 착용하고 있다. 귀를 덮 는 납작한 보닛 형태는 <Fig. 23, 24, 25, and 26>과 같이 귀를 덮는 부분을 위로 젖히거나 이마 부분을 접 어 올린 형태 또는 귀를 덮는 부분에서 귀 부분을 좀 더 길게 내린 형태 등 다양하게 변형한 것을 볼 수 있 다. <Fig. 25>의 경우 모자의 오른쪽 측면에 끝이 뾰족 한 포인트가 있는 백색의 끈들이 묶여 있는 것으로 보 아, 여밈을 위해 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 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Fig. 27, 28, 29, 30, and 31>은 크라운이 둥근 보울러(bowler) 형태 의 모자로서 챙을 접어 올리거나 내리거나 뒷부분 또 는 양옆을 올리는 스타일로 변화를 주었고, 크라운 부 분에 숟가락이나 포인트가 달린 긴 끈을 부착한 것도 특이하다. <Fig. 32>와 <Fig. 33>은 바레트로서 머리에 얹혀진 작은 형태와 한쪽으로 길게 늘어난 형태를 보 이고 있다. <Fig. 34>는 반원의 칼로트로서 4개의 슬 래시가 있고, <Fig. 35>는 후드가 달린 짧은 케이프형 의 샤프롱이다. 이 밖에 <Fig. 36, 37, 38, 39, 40, 41, 42, 43, and 44>의 모자들을 보면 챙이 매우 넓은 모 자, 네모난 형태의 캡, 비니(beanie) 스타일의 모자, 뒤 로 늘어뜨린 고깔형 모자, 챙이 넓은 모자에 앞부분에 짧은 챙이 더해진 형태, 챙이 없는 둥글고 긴 크라운 이 뒤로 늘어진 모자, 광대들이 착용했을 법한 우스꽝 스러운 모자들이 다양하게 착용된 것을 볼 수 있다.
5. Shoes and accessory
16세기의 신발은 앞끝이 둥글며 넓적한 것이 특징 이다. 신발 형태는 슬리퍼형, 슈즈형, 부츠형 등이 있 었다(Shin, 2006). 브뤼겔의 회화에 표현된 서민 남자 들의 신발 또한 주로 앞이 둥근 스타일의 슈즈를 착용 한 것으로 보이지만, <Fig. 19>처럼 고딕시대에 유행 한 끝이 뾰족한 신발도 확인된다.
브뤼겔의 회화에 표현된 16세기 네덜란드 서민 남 자들의 장신구 중에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이 템은 벨트라 할 수 있다. 서민들의 벨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역할뿐만 아니라, <Fig. 3, 5, 6, 7, and 9>처 럼 칼을 차거나 <Fig. 3, 12, 17, and 18>처럼 파우치 (pouch)를 허리 벨트에 매달기도 한 것을 볼 수 있다. 벨트에 칼을 찬다는 것은 호신용뿐만 아니라 일상생 활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것이고, 벨트에 매단 파우치의 경우 당시 바지에 주머 니가 없었기 때문에 소지품을 보관하기 위한 실용적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Table 1>은 이상에서 다룬 서민복식과 귀 족복식의 차이를 아이템별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이다.
Ⅳ. Conclusion
본 연구에서는 16세기 브뤼겔의 회화에 표현된 네 덜란드 서민 남자복식을 아이템별 유형과 특징 그리 고 당시 귀족복식 유형과의 차이를 비교한 결과는 다 음과 같다.
더블릿 속에 착용한 서민들의 슈미즈는 귀족들의 슈미즈와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이 아닌 이 상 거의 대부분 네크라인과 소매에 프릴이 달려 있지 않으며, 품 또한 넉넉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서민들의 더블릿은 귀족들과 달리 패드를 넣지 않 아 바디스와 소매 부분이 전반적으로 여유 있고, 소매 와 암홀 부분은 탈착이 아닌 봉제로 고정되어 있어서 에폴렛은 보이지 않는다. 에폴렛의 부재로 인해 소매 가 없는 조끼형의 더블릿도 착용되고 있다. 허리선 아 래의 페플럼의 경우 앞부분에는 주름이 없고 옆에서 뒤중심까지 주름이 있는 페플럼이 부착되거나, 별도 의 페플럼 없이 더블릿의 길이를 힙 라인까지 연장되 어 활동성을 위해 트임이 있기도 한다. 더블릿의 네크 라인에는 칼라가 없는 스타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후 드가 달린 경우도 있다.
바지의 경우 귀족들은 트렁크 호즈, 베네치안, 트루 스 등 다양한 형태의 브리치즈를 착용한 것에 비해 네 덜란드 서민들은 양말이 허리까지 올라온 형태의 호 즈를 거의 대부분 착용하고 있다. 간혹 허벅지 길이의 짧은 반바지와 통이 넓은 발목 길이의 긴 바지도 착용 되었다. 특이한 점은 호즈의 앞 가랑이에 귀족들이 경 쟁적으로 크기와 장식에 몰두했던 코드피스를 부착하 였다는 것이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남자들이 코드피스를 부착하였다는 것은 당시 패션리더였던 귀 족들의 패션을 서민들이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가 반 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6세기 네덜란드 서민들의 외투는 주로 스페인식 케이프가 선호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브뤼겔이 활 동하던 시기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와 겹치 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중세 말기에 착용되었 던 우플랑드와 유사한 외투도 보이는데 이는 중세 말 기 패션 스타일이 르네상스 시대에도 서민들의 복식 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머리 모양은 귀족들과 동일하게 뒷목이 드러나는 짧은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귀족들의 경우 대부분 목 에 그들의 전유물이었던 러프(ruff) 칼라를 하였기 때 문에 머리를 짧게 잘랐지만, 서민들의 경우 슈미즈에 프릴도 없고 더블릿에도 칼라가 대부분 달려 있지 않 았기 때문에 모든 남자들이 머리가 일률적으로 짧았 다는 것은, 이것 또한 귀족들의 머리 모양에 대한 모 방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민들이 착용 했던 모자는 귀족들이 즐겨 착용했던 모자 스타일에 더해 착용자의 개성과 기호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변형한 것을 볼 수 있다.
신발의 경우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앞끝이 둥근 스 타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간혹 고딕시대 유행했 던 끝이 뾰족한 신발도 유행함으로써 두 시대의 스타 일이 공존함을 볼 수 있다. 서민들의 장신구로는 벨트 가 높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칼이나 파우치를 매달아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피터 브뤼겔의 회화 작품에 묘사된 16세기 네덜란 드 서민복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프릴이나 에폴 렛, 페플럼과 같은 복식의 기능성과 거리가 먼 디테일 적인 요소들은 서민 개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유 무가 결정된 것으로 보이며,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코 드피스를 모방하였다는 점은 현대 사회에서 유행을 추종하는 소비자들의 심리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행의 추종과 더불어 타인과 구분되고자 하는 욕구는 서민들이 착용한 개 개인의 개성과 취향이 잘 드러난 다양한 컬러와 형태 의 모자에서 볼 수 있다.
본 연구의 한계점으로는 피터 브뤼겔의 회화작품 120점 중에서 전원풍의 풍경화를 제외한 서민들의 복 식이 잘 묘사된 작품 48점이라는 적은 수로 16세기 네덜란드 서민복식을 설명하기에 많은 제한이 있었으 나, 본 연구가 국내 학계에서 진행된 르네상스 복식사 연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과 동시에 귀족 중 심의 복식사에서 서민 복식을 재조명함으로써 연구대 상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으며 관련 후속연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