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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6-0401(Print)
ISSN : 2383-6334(Online)
The Research Journal of the Costume Culture Vol.28 No.2 pp.166-180
DOI : https://doi.org/10.29049/rjcc.2020.28.2.166

Oral history study on Japanese menswear custom-tailoring culture

Yhe-Young Lee†, Yung-Hyun Yoo*
Professor, Dept. of Home Economics Education, Korea University, Korea
*Ph.D., Dept. of Human Ecology, Graduate School, Korea University, Korea
Corresponding author (young509@korea.ac.kr)
March 23, 2020 April 21, 2020 April 21, 2020

Abstract


This oral history study explores the past and present Japanese menswear customtailoring culture. Two master tailors with more than 50 years of experience and two young tailors with less than a year of experience were interviewed about the tailor training process and environment, working conditions, thinking and behavior, and societal and governmental efforts for vitalizing custom-tailoring. The results indicate, first, a 10-year apprenticeship was required in the past, whereas young tailors today must register for three-year professional tailoring classes. Tailors then and now have been trained in a similar sequence of pants, vests, and jackets. Second, regarding working conditions, tailors had to provide gratitude services to their masters for a few years, even after their training ended. In contrast, young tailors today must continue a probationary period after their three-year schooling; however, they experience difficulty with finding tailoring shops for their probation. Third, in terms of thinking and behavior, master tailors learned their trade to earn a living, whereas young tailors today entered the field due to their interests in it. In addition, young tailors want a systematic learning process, whereas master tailors learned their skills while on the job. Last, tailoring academies today are run by tailoring shops and societies. Career exploration programs are offered to elementary and middle school students by the Kobe government in association with the local tailoring society to provide tailoring experiences.



일본의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문화에 관한 구술사 연구

이 예 영†, 류 웅 현*
고려대학교 가정교육과 교수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생활과학과 박사

초록


    Ministry of Education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16S1A5A2A0 1025348

    I. Introduction

    일본은 19세기 중반 문호를 개방하면서 서양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 었다. 서양 문화의 유입과 함께 일본의 상류층부터 서양의 복식도 수용하였는데,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이 많았던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 서양 복식을 착용하였 다(Koike, Noguchi, & Yosimura, 2005). 남성 중심의 서양 복식의 수용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1860년대 말 부터 일본의 요코하마와 동경을 중심으로 남성 맞춤 양 복점이 생겨나 서양 테일러(tailors)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으며 영업이 활성화되었다(Kitamura, 1999;Osakabe, 2015). 서양 맞춤 양복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남 성들의 근무복으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시간이 지 나면서 기성복의 인기와 함께 1965년에는 전체 소비 자의 절반 정도(51.4%)만이 맞춤 양복을 착용하였고, 1977년에는 약 20%만 맞춤 양복을 구매하기에 이르 러 기술력을 최고로 유지하면서 유행을 반영하고 납 기일에 맞춰 경쟁력을 갖춤은 물론 젊은 기술자를 적 극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Japanese Western Clothes Newspaper, 1988). 이러한 노력과 섬 세한 일본의 장인정신이 이어지면서 이치방칸과 같 이 정재계는 물론 문화계의 유명 인사들이 찾는 남성 맞춤 양복점이 21세기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Youichi, 2005).

    일본은 전통적인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대를 이어 기술을 전수해가며 전통 공예품을 생산해 높은 품질 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가업에 대한 자부심과 기술 전수에 대한 사명감은 기능분야를 넘어 모든 직업에 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Chang, 2015;Shin, 2008). 하지만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장인들도 위기에 처 했고, 전통적인 도제식 교육과 함께 현대식 교육 과정 을 운영해 전통적 장인 기술과 함께 개선된 기술을 계 승하는 노력을 하였다(Ryu & Sun, 2014).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남성 맞춤 양복 테일러 링 분야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봄으로써 일본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문화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나아가 의류 산업에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전문적 기 술이 명맥을 이어가며 가치를 더할 수 있는 방안을 모 색하고자 한다. 일본의 경력 50년 이상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장인과 경력 1년 미만의 신입 테일러를 면 접해 일본의 과거와 현재의 테일러링 문화에 대해 양 성과정과 환경은 물론 작업 환경을 중심으로 살펴보 고, 테일러링 장인과 신입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협 회나 정부 차원에서의 업계 활성화 노력을 통해 시사 점을 찾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문제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와 현재 일본의 남성 맞춤복 테일러 양성 과정과 환경의 차이를 알아본다. 둘째, 과거와 현재 일본의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작업 환경 의 차이를 알아본다. 셋째, 테일러링 장인과 신입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차이를 알아본다. 넷째,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의 협회와 정 부 차원에서는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노 력은 어떠한 시사점이 있는지 살펴본다.

    Ⅱ. Background: Japanese Adoption of Menswear Custom-Tailoring

    일본인들이 서양 복식을 처음 접한 것은 16세기 천 주교 선교사들이 유럽에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후 쇄국정치에도 불구하고 일부 상류층이 서양식 모자나 케이프(cape)를 착용하기도 했다. 서양 복식의 본격 유입은 막부시대 말기부터 강대한 서양 국가들이 문 호개방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서양 복식의 착 용 순서나 계절 구분을 못하고 전통복식과 혼용하면 서 해학적인 모습을 보였다(Koike et al., 2005). 일본 의 봉건시대에 해당하는 막부시대는 서양의 일본에 대한 문호개방 압력과 내부 제도의 문제로 1867년 천 황을 옹립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막을 내렸다. 메이지천황의 이름을 따라 1868년부터 메이지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는데, 이를 메이지 유 신이라 한다. 이와 함께 신분에 따른 엄격한 복장의 제제가 완화되고, 서양 복식의 도입이 본격화되었다 (Izuch, 2004).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근대화가 빠르게 추진되면 서 1870년 군복에서부터 서양화가 공식적으로 이루 어졌다. 육군과 해군을 각각 프랑스와 영국을 모델로 개편하면서 군복도 양국의 것을 혼용하였다. 이후 공 무원인 나졸, 우편배달부, 경찰, 철도 직원 등의 직무 복이 양복으로 지정되었고, 관리들의 통상복으로도 프록코트(frock coat)가 일반화되었다. 반면 메이지시 대에 여성은 주로 일본 전통복식을 착용하였고, 1880 년대 들어 귀족이나 외교관의 부인과 자녀, 여성 관리 가 주로 공적인 자리나 파티에서 서양 복식을 착용하 기 시작하였다(Koike et al., 2005).

    천황과 황후는 근대화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공식 적인 자리에 서양 복식을 착용하였다(Kitamura, 1999). 천황은 1872년 서양식으로 머리를 자르고 공식적인 자리에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에 와서 천황의 공식복을 비롯한 일본의 군복은 프랑스의 나 폴레옹 3세 시대의 군복을 재현하려 노력하였는데, 이는 유럽 최강국의 힘을 추종함으로써 새 정권을 정 착시키고자 한 결과였다. 하지만 곧 프로이센의 비스 마르크가 프랑스를 제압하며 급부상하자 1887년에는 프로이센 군복을 수용하였다. 군복을 착용한 황제의 공식적인 모습은 근대화와 일본 제국주의의 힘을 상 징하면서 점차 자신감 있고 강인한 남성으로 포장되 었다(Slade, 2009).

    양복의 재봉은 1869년 영국인이 요코하마에 세운 렌크로포드 상회에서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동경의 긴자에 일본인 니시무라가쓰조(西村勝三)가 독일인 재봉사를 고용해 이세카치라는 양복점을 열었 다. 1872년 이후에는 긴자에 또따른 양복점들이 생기 고, 요코하마에도 양복점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양복 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요코하마와 동경의 니혼바시 에서 긴자 일대에 생겨난 양복점들은 외국인 테일러 에게 전수 받아야만 양복을 제대로 만들 수 있었다 (Kitamura, 1999;Osakabe, 2015). 따라서 이러한 고 가의 양복점을 제외하고는 1880년대 중반까지 서양 복의 제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맞음새나 옷 의 완성도가 떨어졌다(Slade, 2009;Yi, 2012). 오사카 에서 출판된 1883년의 재봉교과서에 구체적인 양복 제작 방법은 서술되어 있지 않고, 도면과 실물을 참고 해서 제작하라고 적혀 있는 것을 봐도 당시에 제작된 양복이 완성도가 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Koike et al., 2005). 니혼바시에 있는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1906 년 맞춤복 작업장(atelier)를 열 때에도 영국인 테일러 인 미첼(Mitchell)이 일본인 테일러를 총괄하도록 했 다(“The home,” 2018).

    처음 양복이 도입되었을 때 이를 착용한 것은 개화 나 높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이는 관복에서부 터 서양화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맞춤 양복의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Koike et al., 2005). 양복이 일반인 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후반 이 되어서였다. 이 과정에서 교복의 서양화가 진행되 었다. 또한 전통복식과 서양 복식의 혼용이 이루어지 는 과도기를 겪었다. 일반인들은 우산, 모자, 지팡이, 숄, 신발 등의 액세서리를 부분적으로 먼저 수용하여 전통 복식과 함께 착용하였다. 서양식 재킷에 전통 복 식의 요소가 혼용되는 모습도 있었다(Kitamura, 1999).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899년 양복을 입고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하이카라’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이는 양복의 셔츠에 달린 스탠딩 칼라(standing collar)의 모양에서 온 용어였다. 하이카 라는 1910년대에 가서야 서양의 생활양식이 좀더 보 급되면서 세련된 사람을 지칭하는 긍정적인 용어로 변경되었다(Koike et al., 2005).

    일본에서 양복이 화이트 칼라(white collar)의 직장 인들 사이에서 근무복으로 제대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1차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1920년대에는 우편 으로 지방에서도 양복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많은 수의 여성과 노동자 계층은 밖에서도 여전히 전 통 복식을 착용하고 있었고, 화이트 칼라의 남성들도 집에서는 일반적으로 전통 복식을 착용하였다(Francks, 2009). 이 시기에 여성들은 가정용 미싱을 이용해 간 단한 서양식 아동복, 속옷, 소품 등을 제작하였고, 1920년대 중반에는 서양의 유행 복식을 한 젊은 남녀 가 등장하면서 이들을 ‘모가(모던 걸)’과 ‘모보(모던 보이)’라 불렀다(Koike et al., 2005).

    남성들 사이에서 맞춤 양복의 확산은 1930년대 이 후 급격히 확산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기간에 군 대에 가지 않는 남성들은 서양식 군복과 유사한 카키 색의 국민복을 입었고, 여성들은 몸빼를 포함해 서양 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표준복을 착용하면서 서양 복 식의 편안함을 체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러 한 경험과 미국의 영향으로 남녀 모두 주로 서양 복식 을 착용하게 되었는데, 남성들 사이에서는 아이비리 그 스타일(Ivy League style)이 크게 유행하였다(St George, 2017). 서양 복식 보편화의 확대로 양재 학교 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하지만 1960대에 기성복이 확 산되면서 맞춤 양복의 수요는 197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줄게 되었다(Koike et al., 2005). 이러한 상황에 서도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은 일본 특유의 섬세한 공 예품 생산을 위한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꾸준히 명맥 을 이어갔다. 그 결과,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부드 러운 아르마니 슈트(Armani suits)의 인기와 함께 이 탈리아 현지에서 테일러링 기술을 익혀 일본으로 돌 아와 양복점을 운영하는 테일러가 등장했다(Craig, 2018;St George, 2017). 2000년 이후에도 외국에서 유학과 도제식 교육을 경험한 테일러링 장인들이 활동 중이 며,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Bale, 이치방칸 등 의 맞춤 양복점이 성업 중이다(Crompton, 2016;Youich, 2005). 특히 Bale의 경우, 사무라이 슈트(Samurai suit)라 불리는 스타일을 제안하고 있으며, 본사의 테 일러링 장인이 일 년에 두 번 호주를 방문해 현지 고 객의 주문을 직접 받고 있다(Wiesman, 2015).

    Ⅲ. Research Methods

    본 연구에서는 일본의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문화 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기 위하여 구술사 연구방법을 응용하였다. 구술사 연구방법은 정치사나 권력층의 시각에서 서술된 기존의 역사에 대한 대안으로 생활 사나 민중의 시각에서 그들의 시각을 담기 위해 제안 되었다(Yoon & Ham, 2006). 테일러링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테일러링 장인과 신입의 목소리를 통해 그 문화를 생활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연구를 진행하기 위하 여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2018년 5월 14일에서 16일 사이에 경력이 50년 이상인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장 인 2명과 경력 1년 미만인 신입 테일러 2명과 약 2시 간씩 총합 약 8시간 동안 면접을 진행하였다. 질문은 테일러링을 시작하게 된 이유, 양성과정과 환경, 작업 환경, 테일러의 사회적 위치, 업계 발전 방향 위주로 미리 구성하였고, 구체적인 내용은 <Table 1>에 제시 하였다.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부터 일본 남성 맞춤복 테일러의 양성과정과 환경, 작업 환경은 물론 사고방 식과 행동방식, 협회와 정부 차원에서의 업계 활성화 노력과 관련한 내용을 분석하였다. 면접대상자들이 자연스럽게 본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유 도하였고, 상황에 따라 질문을 추가하여 이야기의 맥 락을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하였다(Yoon, 2013;Yoon & Ham, 2006). 면접 내용은 미리 양해를 구해 녹음하 였고, 면접이 끝나고 전사(transcribe) 및 번역한 후 내 용을 분석하였다. 여건상 2차 면접을 현지에서 실시 할 수 없어 일부 면접대상자에 대한 추가 질문은 이메 일로 진행하였다. 면접은 일본어 통역 및 번역 전문가 를 대동해 진행했으며, 전사와 한국어 번역도 이 전문 가에게 의뢰하였다. 이메일을 통한 추가 질문과 답변 은 한국어에 능통한 일본인에게 번역을 의뢰하였다.

    본 연구가 구술사 연구방법을 응용한 만큼 연구 내 용에 맞는 대표성을 가진 면접 대상자를 섭외하기 위 해 노력하였다(Yoon & Ham, 2006). 대표성을 위해 테일러링과 패션의 중심지인 동경과 고베에서 장인과 신입 테일러 각 1명씩 면접하였다. 테일러링 장인의 경우 현재 성업 중이면서 유명 고객을 유치했거나, 테 일러링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마스터 테일러 (master tailor)를 섭외하였다. 마스터 테일러란 양복의 모든 아이템의 재단과 봉제에 능통한 테일러링 장인 을 뜻한다. 신입 테일러는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테일 러링 전문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면서 일을 병행하고 있는 이들을 섭외하였다.

    섭외한 면접대상자들의 구체적인 정보는 다음과 같다. 동경의 테일러링 장인 A는 1934년생으로 전일 본주문신사복 경진대회에서 1955년 총리대신상을 수 상한 동경의 유명 맞춤 양복점에서 1947년부터 테일 러링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장인 A는 1960년 정식으 로 독립하여 면접을 실시한 2018년까지 계속 동경에 서 맞춤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양복 아카데미도 운영하면서 신입 테일러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는 유 명 야구선수들의 맞춤 양복을 담당했었다. 장인 B는 1941년생으로 히로시마의 맞춤 양복점에서 1956년부 터 테일러링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960년 고베의 양 복점으로 와서 약 27년간 근무하다가 1987년에 독립 해 면접이 실시된 2018년까지 맞춤 양복점을 운영하 고 있었다. 그는 1986년 기능전국체전에서 1위를 차 지하였고, 고베 정부에서 인정한 장인인 고베 마이스 터로 효고현양복상공업협동조합의 부이사장을 역임 하였다. 동경의 신입 테일러 C는 패션과 무관한 전공 으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장인 A가 운영하는 양복 아카데미에서 2017년부터 테일러링을 배우기 시작했 고 면접 당시 24세였다. 고베의 신입 D는 패션전문학 교를 졸업하고, 스포츠웨어 디자이너로 취업했다가 고 베시와 효고현양복상공업협동조합이 함께 운영하는 모노즈쿠리장인대학(ものづくり職人大学)에서 테일러 링을 배우면서 양복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면접 당시 24세였다. 모노즈쿠리는 물건을 만든다는 뜻으로 최 고의 상품을 만들고자 하는 일본의 장인정신을 함축 한다(PMG Knowledge Engine Research Center, n.d.). 면접날짜 및 장소와 면접 대상자에 대한 정보는 <Table 2>에 정리하였다.

    Ⅳ. Results

    동경과 고베에서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장인과 신 입을 면접한 내용을 분석하여 테일러 양성 과정 및 환 경, 작업 환경,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협회와 정부차 원의 업계 활성화 노력을 추출하였다. 구체적인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Tailor training process & environment

    1) Master tailors

    장인 A와 B가 각각 맞춤복 테일러링을 배우기 시 작한 1947년과 1956년에는 양복점에 기거하면서 숙 식을 보장받으며 기술을 배우는 도제식 교육이 일반 화되어 있었다. 도제식 교육은 일본어로 뎃치보코 (でっちぼうこう)라 하는데, 두 장인 모두 생활에 여유 가 없던 시절 양복점에서 더부살이를 하면서 테일러 링을 배웠다. 장인 A의 경우,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2차대전 직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마침 동경의 한 유명 양복점에서 어린 점원을 찾는다고 해 서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테일러의 길을 선택했다. 당 시 양복은 상류사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기술을 익히면 고객이 없어질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일 을 배우기 시작했다. 장인 B는 옷에 대한 관심과 좋은 손재주를 살리고자 테일러가 되었고, 낮에 일을 돕고 야간에 고등학교를 다니게 해준다는 양복점이 있어서 1950년대 중반에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입을 게 누더기 밖에 없었어. 그래서 테 일러가 되면 조금 멀쩡한 걸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테일러가 되었지. (장인 A)

    역시 테일러라는 건 상등품이야. 조금 상징적인 거 지.... 역시 제대로 된 걸 입는다는 건 상류사회. 양 복을 제대로 입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옷을 만드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잠자코 10년 있으면 기술을 익혀서 독립할 수 있고. (장인 A)

    그림이랑 만드는 걸 좋아했어…. 양복점에서 우리 집으로 오면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게 해준다고 하 는 거야. 그래서 양복점에 들어갔어.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양재가 재미있는 거야. 나한테 맞았던 거 지. (장인 B)

    당시 도제식 교육방식에 의하면 양복점을 운영하 는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양복점 일 외에도 집안 일을 모두 해야 했고, 학교를 보내주는 경우 알아서 학비를 해결해야 했다. 휴가는 명절 때 외에는 거의 없었으며, 급여는 용돈 수준만 받았다.

    거기 수행이 엄격해서 한 달에 휴일이 이틀,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일해야 했어... 더부살이야. 양복 점 일은 9시부터 11시까지.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집안일. 청소부터 다 해야 했어. 밤 12시에 잠들 수 있어. (장인 A)

    야간 고등학교에 가야 하니까 5시면 일이 끝나. 일 이 끝나면 학교에 갔다가 9시에 돌아와. 돌아오면 집안일도 해야 해. 그게 견습점원이야. 아침 일찍 부터. (장인 B)

    장인 A와 B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바지, 조끼, 재킷을 모두 만들 수 있는 장인인 모노즈쿠리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10년이 걸렸지만 장인 B의 경우 소질 이 있어 5년 만에 바지, 조끼, 재킷, 코트, 셔츠까지 모두 만들 수 있는 기술자인 우와모노(うわもの)가 될 수 있었다. 바지와 조끼만 만드는 기술자는 시타모노 (したもの)라 부르며, 보통 경력 5년이면 될 수 있었 다. 바지를 익히는데 약 2~3년이 걸리고, 바지를 만들 수 있게 되면 양복점의 수입에 기여하도록 손님의 바 지를 만들면서 조끼 만드는 법을 익혔다. 시타모노로 남기도 하고 계속 배워 우와모노가 될 수도 있으나, 우와모노는 처음부터 재킷 위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 연스럽게 바지와 조끼도 쉽게 익히는 과정을 거치기 도 했다. 보통 시타모노는 남녀 모두 존재했으나, 우 와모노는 주로 남성이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소재 가 귀했으므로 봉제는 중고 옷을 뜯어서 뒤집어서 다 시 만드는 과정을 거쳐 훈련하기도 했다.

    우와모노는 재킷을 만드는 사람, 시타모노는 조끼 하고 바지를 만드는 사람이야. 시타모노는 여자로 충분해. 대개 5년 정도 하면 할 수 있어. 그건 대체 로 여자가 가정에서 할 수 있어. 그리고 우와모노 는 남자 10년 이상의 경험자야. (장인 A)

    예전에는 천이 없던 시대라 귀했기 때문에 옷을 한 번 다 풀어서 조각으로 안쪽을 다시 사용했거든. 뒤집기라고 하는 일이 있었어. 뒤집어서 일을 익히 는 거야. (장인 B)

    장인 B의 스승은 턱시도 제작 기술로 유명했다. 비 수기인 여름에 장인 B는 스승과 함께 전국을 돌며 유 료로 턱시도 제작 강습회를 열기도 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 테일러가 강습회를 통해 추가 기술 을 배우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턱시도라고 있죠? 가수들이 입는. 옛날에 그 턱시 도가 아직 그다지 유행하지 않은 무렵 스승님은 턱 시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스승님하고 그 걸 강습하러 전국을 돌았어... 여름에는 아무래도 비수기야. 그 때 우리 업계 축제 같은 걸 각지에서 했거든. 하기강습회를. 양복 바느질 방법을. 그래서 턱시도로 홋카이도까지 갔어. 규슈, 시코쿠, 대략 전국을 다 돌았어. 아직 장인들이 턱시도 바느질법 도 모르던 시대였으니까. (장인 B)

    일본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고도의 성장기를 거치면서 다른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어 테 일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1967년 노동기준법이 생기면서 견습공에게도 월급, 보너스, 퇴직금, 보험, 연금 등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부담이 생겨 더부살이 도제식 교육은 거의 사라 졌다. 장인 A도 60년대 후반에 도제식으로 견습생을 키울 여유가 없었다. 테일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줄 어든 가운데 1970년대에는 양복도 기성복의 인기가 커지면서 맞춤복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으나, 장인 A는 본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은 불황이 없었다고 하였 고, 장인 B는 1992년경까지 고급 맞춤복 고객이 많아 호황이었다고 했다.

    빚이 있었어.... 도제제도라고 하면 우선 아무 것도 못하는데 세 끼 먹이고 재우고 기술 가르쳐서 월급 주고 보너스 주고 사회보험도 가입해야 하는 거야. 그 여유가 없었어. (장인 A)

    지금은 월급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가 게도 [도제식 견습생을] 고용하지 않게 되었어. (장인 B)

    테일러 지망생과 도제식 교육이 거의 사라지면서 우와모노의 수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테일러를 양 성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면서 장인 A는 1970년에 각 지방의 직업훈련학교(장애인 직업훈련 학교 포함)의 양복과에서 1년 정도 양복을 배운 견습 생을 17명 모집해 채용하였다. 신체장애자를 사회에 복귀시키는 일에 공헌했다고 동경도지사에게 감사장 도 받았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견습생을 많이 채용한 데에서 오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키워낸 제자가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떠나버리는 과정을 경 험하면서 도제식 교육을 지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3년 정도 참고 [도제식 교육을] 했지만 결국에는 이건 적자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두자고... 그런 문제 속에서 기성품이 자꾸 나와. 그러면 17명이나 고용하면 어떻게 먹고 살아? 한 달에 몇 벌이나 주 문 받지 않으면 안 돼. 17명은 아직 장인이 되지도 않았어. (장인 A)

    야마우치라는 녀석인데 20세로 연령 제한이 있는 기술 경진대회에서 동경 대표로 뽑혔어... 6개월 동 안 매일 밤 12시까지 맨투맨으로 가르쳤어... 녀석 이 경진대회에서 2위의 성적을 거둔 거지. 반년 후 에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뭐냐고 물었더 니 “신세 많이 졌습니다”하고 퇴직한 거야. 그 일 이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어. 이제 나는 기능자 양 성은 그만두려고 마음을 먹었어. (장인 A)

    2) Incoming tailors

    면접한 테일러들에 의하면 현재는 문화복장학원과 같은 패션전문 교육기관에서도 테일러링을 가르치고 있으나,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내용을 개괄적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맞춤복 테일러가 되려면 양복점에서 추가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전문 맞 춤복 테일링 교육은 고급 양복점에서 아카데미를 운영 하면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동경양복조합과 같은 기 관에서 실시하기도 한다. 고베의 경우, 2001년부터 고베 시와 효고현양복상공협동조합이 연합으로 고베모노 즈쿠리장인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동 경양복조합의 교육기관에는 면접이 진행된 2018년 당 시 등록생이 1명이었으나, 수업이 일정대로 시작되지 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고베의 모노즈쿠리장인 대학의 경우 3년에 한 번씩 신입생 9명을 모집했으나, 전문적인 젊은 테일러를 양성한다는 취지와는 다르게 나이가 든 사람들이 입학해 취미로 배우거나, 취직, 대 인관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학업을 중도 포기 하기도 했다. 졸업 후 테일러링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 이 많아지면서 앞으로 운영을 중단할 예정이라 하였다.

    장인 A와 B가 생계나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테일 러링을 배우기 시작했다면 신입 C와 D는 테일러링에 대한 관심에 따라 자발적 선택에 의해 학업을 시작하 였다. 신입 C는 부모가 모두 의류업계에 종사하여 대 학에서 패션과 무관한 전공을 공부한 이후 진로를 바 꾸어 테일러가 되기로 결심하여 장인 A가 운영하는 양복점의 2층에 개설한 아카데미에 등록하였다. 장인 A의 양복 아카데미 수업은 외부에서 장인이 와서 수 업을 진행하였는데, 한 장인이 바느질을 이틀 동안 가 르치고 하루는 또다른 장인이 패턴을 가르쳤다. 이 아 카데미에는 당시 신입 C 외에 세 명의 학생이 더 있었 다. 신입 D는 패션전문학교를 졸업해 디자이너로 일 하던 중 모노즈쿠리장인대학의 재학생들의 양복 전시 회를 보고 매력을 느껴 모노즈쿠리장인대학에서 테일 러링을 배우게 되었다. 신입 C와 D처럼 기성복과 차 별화되는 옷에 대한 관심에서 테일러링에 입문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다른 양복점에서 일하시는 선생님이] 테일러 일 도 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 [우리 아카데미에] 와서 가르쳐 주셔. 월요일과 수요일 10시부터 5시까지. (장인 A)

    전에는 [테일러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적었 는데 지금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 복식전문학교 졸업해서 세련된 감각도 있고, 다른 사람과 다른 옷을 입고 싶다고 하는 아이가 많아졌어... 4, 5년 에서 10년 정도 전부터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했 어... (장인 B)

    아름다운 것… 양복은 드레스 부류에 들어가는데 요. 저는 부모님이 모두 의류 관계셨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어패럴 계통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 어요. 그 중에서 역시 드레스, 양복 장인이 되고 싶 다는 마음이 강했던 게 동기예요. (신입 C)

    원래 옷을 좋아했다는 것과 저도 [장인 B] 선생님 하고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거랑 예 술을 매우 좋아했어요... 패션전문학교에 다니게 되 고, 마침 졸업할 무렵에 우연히 고베의 이 학교[모 노즈쿠리장인대학]... 저는 이 학교 6기생인데, 5기 생 선배님들 졸업 전시회 작품을 보고, 이런 세계 가 있구나 하고 굉장히 감동했어요. (신입 D)

    면접한 테일러들에 의하면 동경의 양복 아카데미 와 고베의 모노즈쿠리장인대학 모두 보통 3년의 교육 과정을 거치는데, 도제식과 마찬가지로 손바느질 등 기본 봉제에서 시작해 바지, 조끼, 재킷의 순으로 재 단과 바느질을 배운다. 하지만 과거에는 양복점의 일 뿐만 아니라, 스승 집의 가사일까지 도와야 했으므로 테일러링 기술을 익히는 데에만 집중할 수 없어 긴 수 련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양복 아카데미나 모노즈쿠 리장인대학에서는 온전히 테일러링 기술만 집중적으 로 훈련받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바지, 조끼, 재킷, 코 트까지 모두 배울 수 있었다.

    신입 C가 등록한 동경의 양복 아카데미의 경우, 주 3회 하루종일 교육으로 첫 1년 동안 바늘 쥐는 방법과 골무 사용법에서 시작해서 시침질, 사뜨기 등 바느질 을 연습한 후 바지로 들어가 임시바느질, 본바느질, 다림질을 순서대로 배우고, 이 과정에서 패턴도 함께 배웠다. 약 3개월씩 바지, 조끼, 재킷의 순으로 배우는 데, 여러 벌을 반복적으로 만들면서 익힌다. 이렇게 1 년 동안 바지, 조끼, 재킷을 모두 배우고 나서 2년차와 3년차 때에는 다시 복습으로 바지, 조끼, 재킷의 순으 로 반복 제작하면서 일을 익힌다. 추가로 3년차 때에 는 코트를 배운다.

    신입 D가 다니는 고베의 모노즈쿠리장인대학에서 는 주 4회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업을 진행했 다. 첫 한 달 동안은 역시 바늘 쥐는 법부터 시작해서 기초적인 손바느질을 훈련하고, 용구 다루는 법을 익 힘은 물론, 실을 끼우지 않은 재봉틀로 신문지에 제대 로 박는 연습을 했다. 이후 주머니를 만드는 부분봉을 연습하고 나서 패턴을 떠서 바지를 만드는 훈련을 하 는데, 바지 제작을 모두 배우기까지 1년 정도 소요된 다. 이후 2년차 초반에서 중반까지 조끼의 부분봉부 터 시작해서 패턴을 떠서 조끼를 완성하는 과정을 습 득하고, 이어서 같은 방식으로 재킷을 배운다.

    신입 C와 D 모두 일주일에 3~4일 교육을 받고 남 은 시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충 당해야 했다. 모노즈쿠리장인대학의 경우 한 달에 25,000엔의 학비를 내어 비교적 저렴했지만 양복점 아카데미의 경우 월 80,000엔을 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신입 C는 교육이 없는 날에는 백화점의 수선 집이나 하청업체에서 바지를 제작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육을 도중에 포기하고 수선집에 취직하 는 신입 테일러도 있었다. 모노즈쿠리장인대학에 신 입 D와 함께 입학한 동기 중 한 명은 생활고로 학업 을 중도에 포기했다.

    역시 주 4일이나 5일은 아르바이트 하면서... 그 건 물 안에 지하에요. 바지 만들거나 통째로 한 벌. 싼 월급으로.... 만든 만큼이요. (신입 C)

    저는 오사카에서 계속 다녔는데 아르바이트하면서 스스로 전부 변통을 해서 학교에 다녔어요. 학비도 모두 스스로... 월화수목 학교 다니고 금토일 아르 바이트 해서. (신입 D)

    그 분은 나고야에서 오신 분인데, 스스로 아르바이 트하면서 나고야하고 고베를 왔다 갔다 하며 돈도 보내면서 학교를 다니셨는데요. 그런데 어머니도 몸이 안 좋으셨고 여동생도 몸이 안 좋았어요. 점 차 생활도 어려워져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지 금은 전혀 다른 직종인 음식점 쪽에서 일하시는데, 일전에 만나서 얘기했는데 아직 테일러 쪽으로 가 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해요. (신입 D)

    모노즈쿠리장인대학에는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요일마다 네 명의 장인이 수업을 맡아 진행했는데 내 용은 이어서 가르친다. 하지만 장인들이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고 장인마다 작업방식이 달라 학생들이 처음 기술을 습득하는데 혼란을 초래 하기도 했다.

    이어서 가르치시지만 각 선생님마다 그 방식이 다 르고 개인적인 방침을 갖고 계신 분이 많아요. 한 번 가르쳐주신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이 방법은 틀 렸다고 풀어서 다시 하는 경우도 있어요. 선생님 마다 각자 하는 방식이 달라서 여러 사람의 방식을 단번에 익혀야 하는 점이 상당히 혼란스러웠어요. 저는 처음에는 교과서대로 기초만 배우고 나중에 선생님 한 분 한 분 개개인의 방식을 어레인지하는 식으로 배웠으면 좀 더 잘하기 쉬웠을 것 같아요. 정말로 처음에는 교과서대로만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기초를 가르쳐 주신 후에 선생님들의 어레인지를 듣고 4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것이 좋 은 방법인지 선택할 수 있었으면... (신입 D)

    양복 아카데미와 모노즈쿠리장인대학 모두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면 우와모노가 될 수는 있으나, 모노즈쿠리가 되기 위해서는 양복점에서 실무를 익히 는 추가 훈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신입 테일러들이 훈 련할 수 있도록 받아주는 양복점은 많지 않았다.

    모순인 것 같아요.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제로는 사이가 나 쁘셔서 말씀만 하시는 것 같아요. 입으로는 그렇게 얘기하시면서 실제로는 일할 곳도 없고 가르쳐주 는 분도 일체 없는 게 현실이라서... (신입 D)

    세대교체 하고 싶다는 얘기는 자주 듣지만 실제로 ...새 가게를 내주신다거나 가게에 제자로 들이신다 거나 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신입 D)

    2. Work environment

    1) Master tailors

    장인들은 모노즈쿠리가 되고 나서는 바로 독립하 지 않고 스승에 대한 감사의 예우로 기술자로 공임을 받으며 일을 했는데 이를 오레보코(お礼ぼうこう)라 하였다. 장인 A의 경우, 우와모노가 된 후 일하면서 번 돈을 모아 1958년에 스승의 양복점의 지점의 형태 로 독립하여 양복 한 벌당 기술 공임만 받고 오레보코 하다가 1960년에 본인의 이름을 걸고 양복점을 열어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처음에는 우와모노는 직접 고 용하고 집에서 일하는 시타모노에게 하청을 주어 일 부 제작을 맡기기도 하면서 일했다. 이때에는 경제적 인 어려움으로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도제식 견습공 은 두지 않았다. 장인 B는 히로시마의 시골 양복점에 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승님의 권유에 따라 고베 로 옮긴 이후 1960년부터 1987년까지 약 27년간 한 양복점에서 일하였는데, 기술자가 된 이후로도 오레 보코하다가 1987년에 본인 이름의 양복점을 열었다.

    돈은 전부 내가 다 대고 시작한 가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양복점 임대한 계약자 이름이 내가 아니고 스승님으로 되어 있는 거야.... 깜짝 놀라서 거기서 그만 뒀지.... 그래서 1년 반 오레보코한 걸 로 마무리했어.... [오레보코할 때에] 나는 양복 만 들면 기술료만 받았지. (장인 A)

    거기[스승님 양복점]에서 스승님이 돌아가실 때까 지 수행했어... 견습으로 4년간. 4년 지나서 일단 기술자가 돼서 그때부터 쭉 스승님이 돌아가실 때 까지. (장인 B)

    장인 A와 B 모두 오랜 기간 수련한 후 기술을 전수 해준 스승에게 감사의 표시로 오레보코의 기간을 가 진 것은 사제 간의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장인 A의 제자 중 기술을 전수받 고 조건이 좋은 다른 양복점으로 이직해 간 사례와 같 이 오레보코에 대한 사고방식이 세대를 거치면서 차 이가 났음을 알 수 있다. 장인 B는 사제 간의 신뢰 외 에도 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뢰의 중요성을 언급 하였다.

    그 사람, 입는 사람의 인격이나 그런 건 바꿀 수 없지 만 ‘품격’과 ‘풍격’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신용해 주지 않으면... 손님과의 신뢰 관계예요. (장인 B)

    앞서 언급했듯이 장인 A가 테일러 양성에 기여하 기 위해 1970년대에 도제식으로 채용해 양성한 기술 자는 7명인데, 그들을 대부분 각각 고향으로 보내 택 배 시스템을 이용해 하청 작업을 맡기기 시작했다. 제 자 중 공장의 매니저로 취직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의 조언에 힘입어 기계의 발전을 인지하고 수작업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부분은 기계로 제작을 대체했다. 수작업이 주를 이루는 고급 맞춤양 복도 제작하면서, 1990년대부터는 분업 체계를 갖춘 하청 공장에 본인의 제작 스타일이나 방식을 교육해 생산을 맡겨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의 맞춤 양복도 생 산하고 있다. 이는 이지오더(easy order)라는 일본의 독특한 공장 생산 방식으로, 고객의 치수에 맞는 패턴 에 따라 재단해 공장에서 대부분의 봉제가 이루어지 는 제작 시스템, 즉 시스템 오더에 해당한다.

    우리가 공장에 가서 지도하는 거야... 우리 샘플을 가져가서 “여기는 이렇게 해주세요. 여기는 저렇 게 해주세요”라고. 매년 열흘 정도 가서 공장하고 미리 의논해. (장인 A)

    2) Incoming tailors

    젊은 테일러들은 교육이 끝나면 보통 시타모노로 취직해 현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취직할 곳이 많지 않다. 운이 좋으 면 고급양복점에서 시급을 받으며 일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무급이나 평균 이하의 월급을 받고 일을 시작한다. 신입 C는 운이 좋아 고급 양복점에 유급으 로 들어가는 상황을 “타이밍”이라고 표현했다. 현장 에서는 짧은 교육기간에 배우지 못한 좀더 자세한 기 술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졸업 후 어렵게 양복점에 취직을 하더라도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어 일을 그 만두는 경우도 많고, 일정 기간 내에 기술이 좋아지지 않으면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견습이죠. 자칫하면 동경 안에서 처음 두 달은 월 급이 제로이고, 두 달 이후에도 5만 엔인 곳도 있 어서. 하청의 하청이라면.... 그래도 의외로 [졸업생 들이] 가요. (신입 C)

    각 회사의 방식이 있어서 자기가 만들고 있는 바지 만드는 방법하고 다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해 야 해요. 그리고 거기서 배워서 한두 달은 [월급 이] 제로인거죠. (신입 C)

    졸업생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빠듯하게 생활할 정 도라고. 최저 임금 정도의 월급밖에 못 받는다고 했어요. 월급 면에서 말하면 보통 우리 세대 신입 사원하고 비교하면 압도적이라고는 못하겠지만 거 의 밑이네요. 역시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그만둔다 는 얘기도... (신입 D)

    인간관계로 그만두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 인간관 계에서 고생한다고 들었어요. 대부분의 졸업생은 그래서 그만두셔서 테일러로 일하시는 분은 극히 소수네요... 선배한테 이지메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 는데 그게 싫어서 그만두셨다는 분도 계셨어요. (신입 D)

    그나마 그것도 가계약 같은 형태로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 사원하고 비슷해요. 그 회사에 열심히 근무 하고 있지만 그분 말에 의하면 일회용 같다고. 일 년 이내에 기술이 숙련되지 않으면 잘린다고 하는 데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태라고 하네요. (신입 D)

    장인 A와 B와 같이 70대와 80대의 테일러는 많지 만 세상을 떠나 수가 줄어들고 있고, 40대와 50대 테 일러는 수가 상당히 적으며, 심지어 60대도 많지 않다 고 했다. 패션에 관심이 있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연출 하고자 하는 수요가 생겨남에 따라 오히려 젊은 세대 인 20대와 30대의 테일러는 수가 차차 늘어가고 있다. 신입 D에 의하면 2010년대 중반부터 오사카에서 신 진 테일러 콘테스트가 개최되었는데, 점차 참가자 수 도 많아지고 참여하는 지역도 확대되었다. 이런 점은 젊은 테일러의 수가 늘어난 것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일본은 60~80대의 고령 장인과 20~30대의 젊은 테일러들로 나뉘는 양극화 현상으로 작업에 있어서 세대 간의 행동방식이나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다. 신입 C에 의하면 현장에서 고령 장인의 경우 젊은이들의 기대와 다르게 친절히 가르쳐 주지 않고 엄격히 교육하는 경우도 많고, 본인의 기술을 전 수하지 않으려는 이도 있다. 또한 이들 장인들은 과거 의 도제식 방식의 잔해로 몸으로 익히거나 눈으로 보 고 배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젊 은 테일러들은 이미 배운 것을 아는척 하면 모르는 부 분까지 가르쳐주지 않는 경우도 있어 아는 것도 모르 는 척 해야 하는 등 신․구세대의 차이로 직장에서 인 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 해 테일러링을 그만두는 젊은이들도 많다.

    면접한 테일러들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과거에 영 국식 테일러링이 기본을 이루었다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식 테일러링이 인기를 끌어 유학 생들도 늘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 영국식 테일러링 을 정통으로 보는 선입견이 있어 양복조합과 같은 기 관을 통한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신입 C가 언급 했다.

    이밖에도 신입 C에 의하면 젊은 테일러들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면접 내용을 볼 때 신입 D의 경우 주변의 신입 테일러나 모노즈쿠리장인 대학의 졸업생들과 정보를 주고 받고 있는 것으로 파 악되었다. 따라서 젊은 테일러들 사이의 조직적인 교 류는 없으나, 소규모의 교류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 는 것으로 보인다.

    3. Ways of thinking and behaving

    면접 결과, 테일러링 장인과 신입의 사고방식과 행 동방식은 큰 차이를 보였다. 장인들은 생계를 위해 테 일러링을 시작한 반면, 신입들은 능동적인 관심에 의 해 테일러링을 배우기 시작했다.

    도쿄의 아사쿠사바시라는 곳에서 나이 어린 점원을 모집하고 있어서 양복점에 뛰어든 거야. (장인 A)

    우리 집이 가난해서 고등학교에 다니게 해 줄 곳을 찾았던 거지. (장인 B)

    역시 아름답게 좋은 걸 만들고 싶다는 염원뿐이라 서 다른 데보다 아름답고 좋은 걸 만든다는 자기 만족의 세계. (신입 C)

    내장된 직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 취업 을 취소하고 고베로 와서 처음부터 이 학교에서 배 우기 시작한 게 시작이네요. (신입 D)

    장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장기간 기술을 습득하 였다. 반면 신입 테일러 중에는 일이 자체가 고되거나 직장 내 따돌림과 장인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표현을 잘 안 함으로 인해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 껴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젊은이들 은 묵묵히 긴 인내의 시간을 보낸 장인들과 사고와 행 동방식의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거기 수행이 매우 엄격해서 한 달에 휴일이 이틀,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어…. 너 10년 동안 참고 일할 수 있냐고 했어. 저는 10 년을 인내하면 일본 전국의 양복점에서 일할 수 있 다고 해서 그 결과 13년 반 있었어요. (장인 A)

    견습으로 4년간. 4년 지나서 일단 기술자가 돼서 그 때부터 쭉 스승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1987년까 지 [함께 일했어]. (장인 B)

    숙련되고 양복점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다고 해서 돈 벌고 싶어서 수선으로 가는 사람도 있어요. (신 입 C)

    동기생들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상당히 장인이라는 느낌으로 겉으로 드러내는 분들이 아니어서 여러 인간관계에서 고생한다고 들었어요. 대부분의 졸 업생은 그래서 그만두셔서 테일러로 일하시는 분 은 극히 소수네요. (신입 D)

    장인들은 제자와의 관계는 물론 고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감사와 신뢰를 중시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앞서 언급했듯이 제자가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로 떠나는 등 사제 간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실 망감이 컸다.

    전 인복도 있었고 사람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제 일을 가르쳐주신 스승님이 두 분 계세요. 히로시마 시골의 스승님과 고베의 스승님. 히로시마와 고베. 이것도 만남입니다. 그 사람들이 절 잘랐다면 지금 의 저는 없어요. (장인 B)

    또한 테일러 양성 과정에서 장인들은 체계적인 교 육보다는 본인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견습생들이 현장 에서 직접적인 가르침 없이 과거처럼 어깨너머로 체 득하기를 바랐다. 반면 젊은이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교과서에 의한 체계적인 교육을 선호하였다.

    65~80세의 장인들이 메인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 문에 “보고 배운다”는 식의 옛날 방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몸으로 배워라”라는 방식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입 C)

    봉제공장[신입 테일러가 기술자로 고용되는 양복점 의 하청 공장]은 임금이 낮아 힘든 노동시간과 엄 한 가르침으로 아무래도 자세하게 정성껏 지도하 고 키우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신입 C)

    실제로 일할 곳도 없고 가르쳐 주는 분도 일체 없 는 게 현상이라서... (신입 D)

    4. Societal and governmental efforts for vitalizing menswear custom-tailoring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의 협 회와 정부 차원에서 기울인 노력의 예로 고베시의 마 이스터 제도의 도입을 들 수 있다. 고베시 차원에서 기술직 활성화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였고, 이는 일본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고베가 제일 처음에 생겼어. 지금은 전국에 있어. 전전 사사야마 시장이 일본은 자원이 없고 기술로 큰 나라라는 이유로 기술자를 소중히 해야 된다고 해서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를 도입했어. 초일류인 사람, 일본 전국, 세계 어디서든 통용할 수 있는 기 술자를 마이스터로 임명했어. (장인 B)

    또 다른 예는 1960년대 후반 줄어드는 테일러를 양 성하기 위해 1년 과정의 직업훈련학교를 운영하고 장 인들이 나서 도제식 견습생들을 채용한 일을 들 수 있 다. 양복점에 큰 부담이 되어 크게 활성화되지는 않았 지만, 이러한 노력이 21세기까지 이어져 양복점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거나 동경양복조합이나 고베의 모 노즈쿠리장인대학과 같은 전문 교육 기관이 생겨났 다. 이러한 예로부터 테일러 양성을 위해서는 체계적 인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학생들이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함을 알 수 있 었다.

    고베에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진로탐색을 위 해 손바느질, 넥타이 만들기, 맞춤 청바지 만들기 등 의 직업체험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만 드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재능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테일러링 관련 교육은 어린 학생 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계발하는데 큰 힘이 되어 젊은 테일러 육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생 대상으로 하는 체험학습은 이번에는 우 리가 그 학교에 가서 교육을 해. 우리 업계에서는 이 넥타이를 만들어. 그리고 이걸 계속 공그르기 시켜. (장인 B)

    저는 중학생에게 현의 교육위원회, 고베시의 교육 위원회에서 직업교육으로 중학생에게 여러 가지 일을 가르치러 가고 있거든요. 역사에서 양복은 어 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그리고 왜 이 직업을 선택했 는지 그런 것도 여러 가지 두 시간 정도 이야기해 요... 체험교육이라고 해서 두 장의 이 정도의 천을 주고 바지를 여기부터 아래까지 자기 통을 만들어 서...밑단의 접어 꺾은 부분을 만들게 하는 거야. (장인 B)

    ‘트라이얼위크’라고 해서 이번에는 중학생이 가게 에 와.... 우리 가게에 와서 공방에 와서 체험하는 거죠. 그 아이에게 청바지 같은 걸 만들게 해요. 일 주일이에요. 그 일주일 동안 매일 가게에 와... 대 체로 바느질할 수 있어요. 어려운 곳은 내가 도와 주지만. (장인 B)

    Ⅴ. Conclusions

    본 연구에서는 모노즈쿠리 정신을 가지고 대를 이 어 양복점을 경영하는 일본의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자 일본의 테일러링 장인과 신입 각 두 명과 면접을 실시하여 구술사 연구 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과거와 현재의 테일러 양성 과정과 환경, 작업환경,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업계의 활성화를 위한 협회와 정부의 노력을 추출하였다. 결 과를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와 현재의 테일러 양성 과정과 환경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 테일러 양 성은 도제식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다. 견습생이 양복 점에 더부살이하면서 집안일도 병행하며 기술을 배워 나갔다. 보통 10년에 걸쳐 바지, 조끼, 재킷의 순으로 배웠으며, 우와모노가 될 때까지 소정의 용돈 외에 별 도의 급여는 받지 않았다. 이러한 도제식 교육 문화는 일본의 산업화와 함께 1960년대에 많은 일자리가 생 겨나 테일러라는 직업의 매력이 떨어지고, 최저시급 제 등의 각종 노동기준법이 생겨나고 기성복이 확산 되면서 맞춤복 업계에 경제적 부담이 되어 서서히 자 취를 감추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도제식 교육 외에 도 지방 강습회를 통해 테일러링 기술 교육이 이루어 지기도 했다. 현재는 양복점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 나 지역 협회와 정부가 설립한 전문교육기관(동경양 복조합, 고베 모노즈쿠리장인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고 테일러링 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교육과정은 대체로 3년이고 일주일에 3~4일 수 업이 진행되며, 도제식과 마찬가지로 기초바느질부터 시작해서 부분봉을 익힌 후 바지, 조끼, 재킷의 순서 로 교육하였다. 학생들은 학비를 내야 하고, 따로 생 활을 하므로 수업이 없는 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생활고로 일을 그만두는 경우 도 있었다. 집중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장인들 간의 작업 방식이 달라 학생들이 혼란을 겪기도 하였고, 졸 업 후 추가 견습을 하기 위해 양복점에 취직을 해서도 방식이 달라 새로 배워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어 체계 적인 교육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테일러링 작업 환경의 경우 과거에는 기술을 모두 습득하고 나서도 스승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약 2년 정도 독립하지 않고 기술비만 받으며 일을 하는 오레보코의 문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독립을 하고 나 서 혼자 일을 다 못할 경우 시타모노나 우와모노를 고 용하거나 하청을 주어 양복점을 운영하였다. 기계생 산이 활성화되면서 일부 작업을 공장에서 기계로 처 리해 맞춤 양복의 단가를 낮추기도 하였다. 현재 이러 한 상황에서 3년간 교육이 끝난 테일러는 재킷까지 기술을 모두 배웠으나, 양복점에서 추가 견습을 해야 하지만 무급이나 유급 모두 취업이 힘든 상황이다. 취 직을 하더라도 일정 기간 내에 기술이 향상되지 않으 면 해고를 당하기도 해 각종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직 장에서 장인이나 선배와의 갈등으로 테일러링을 그만 두는 이들도 있다. 특히, 현장에서 장인이 과거 방식 대로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본인의 노하우를 가르쳐주 지 않기도 하고, 체계적인 교육 대신 어깨너머로 익히 는 과거의 방식을 강요하여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하 지만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테일러링에 매력을 느껴 일을 시작하는 20~30대가 늘고 있어, 현장 분위 기를 개선하기 위해 이들 간의 조직적인 교류가 필요 한 상황이다.

    셋째, 테일러 장신과 신입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장인들은 생계를 위해 테일 러링을 시작한 반면, 신입들은 능동적인 관심에 의해 테일러링을 시작하였다. 또한 테일러 양성 과정에서 장인들은 체계적인 교육보다는 본인의 방식을 고수하 면서 견습생들이 현장에서 직접적인 가르침 없이 과 거처럼 어깨너머로 체득하기를 바랐다. 반면 젊은이 들은 교과서에 의한 체계적인 교육을 선호하였다. 사 제 간이나 고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장인들은 감사 와 신뢰를 중시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제간 의 관계도 변화했다.

    넷째,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 의 협회와 정부 차원에서 기울인 노력의 예로 고베의 마이스터제와 1960년대 후반 줄어드는 테일러를 양 성하기 위해 1년 과정의 직업훈련학교를 운영하고, 장인들이 나서 도제식 견습생들을 채용한 일을 들 수 있다. 양복점에 큰 부담이 되어 크게 활성화되지는 않 았지만 이러한 노력이 21세기까지 이어져 양복점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하거나 동경양복조합이나 고베의 모 노즈쿠리장인대학과 같은 전문 교육 기관이 생겨났 다. 이러한 예들로부터 테일러링 양성을 위해서는 체 계적인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학생들이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고베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 로 진로탐색의 일환으로 실시한 테일러링 관련 교육 은 어린 학생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계발하는데 큰 힘 이 되어 젊은 테일러 육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통해 과거와 현재 일본의 남성 맞춤복 테일러의 양성 과정 및 환경과 작업 환경의 차 이는 물론 사고와 행동 방식의 차이를 파악함으로써 일본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 할 수 있었다. 남성 맞춤복 테일러링 시장의 활성화와 테일러 양성을 위해서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맞는 테 일러링 교육과 작업환경의 조성이 필요하고, 협회와 정부가 협력하여 전문교육을 실시할 때 학생들이 학 업에 집중하고, 해당 업계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뒷받침과 업계의 일자리 마련이 보장되어야 함을 알 수 있었다. 테일러라는 직업에 대한 진로탐색 을 위해 어린 학생들에게 테일러링 관련 체험학습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해 운 영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는 과거 기능올림픽에서 연속으로 우수한 성적을 내며 전성기를 누렸지만 국내외 명품 맞춤 양복 브랜드의 등장, 기성 양복과 시스템 오더 (system order)에 의한 반맞춤복의 보편화로 남성 맞 춤복 테일러링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 사라지고 있는 한국의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보인다 (Hong, 2006;Kim, 1990;Kim, 2000;Kim, 2008;Kim, 2017;Kwon, 1999;Nam, 1992;Yang, 2003). 후 속으로 한․일 비교 연구를 진행한다면 보다 심도 있 는 활성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 남성 맞춤복 협회와 정부의 업계 활성화 노력에 대한 문헌조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본 연구의 한계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속연구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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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pend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