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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6-0401(Print)
ISSN : 2383-6334(Online)
The Research Journal of the Costume Culture Vol.19 No.4 pp.723-739
DOI :

바로크(Baroque) 양식 시대 서양 남성복에 나타난 남성의 몸 이미지

이효진
전북대학교 의류학과

Male Body Image Appearing on the Western Men's Costume in the Baroque Era

Hyo-jin Lee
Dept. of Clothing & Textiles, Chonbuk National University

Abstract

This research seeks to analyze western men's costume in the Baroque era in relation to men's physical beautyfrom its most detailed and interesting perspective to fomulate a plausible reasoning related to the aesthetic senseof body as expressed in men's costume. This research used national and international books, theses and internetdata upon which to base a literature review for a correct understanding of Baroque style and at the same timeempirical research to analyze the body image expressed in men's costume. The Baroque style expressed in the 17thcentury costume offered a dynamic feeling through wavy curves, and its brilliant and colorful decorations createda passionate and charming mood resembling a flame. Accordingly, this research studied the body image as itappeared in the form of 17th century western men's costume by dividing it into the contact beauty of the humanbody and the manner of hiding the architectural beauty of the human body. First, the exposed silhouette by clothingcoming into contact with the human body could be found mainly in upper-class men's costume in the first halfof the 17th century. The shorter and tighter doublets and knee breeches could be analyzed in terms of erotic imagerythat emphasized masculinity, aristocratic imagery that stressed a distinctive status, and geometric imagery thatexpressed a triangular pattern. Second, the constructive expression by hiding the human body could be found inupper-class men's costume starting in the mid-17 century. The wearing of the justaucorps could be studied in termsof how it came into contact with the beauty of the human body but also how this clothing style the hid thearchitectural beauty of human body.

01(5)_논문 05.pdf2.65MB

Ⅰ. 서 론

 복식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그리고 착장 방법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는 동태미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다른 조형예술과 차이가 있다. 즉, 복식은 사람의 몸에 의해 생명력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는데, 복식의 형태를 좌우하는 사람의 몸은 각 시대나 문화, 사회적인 배경에 의해 이상미가 변화하며 발달해왔다. 그에 따라 복식의 형태도 변화하는 등 몸에 대한 이상미의 변화는 복식의 중요한 표현 대상이 되어왔다.1) 몸에 대한 이상미는 몸과 복식과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형성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복식을 논함에 있어서 인체미, 신체미 등의 인간의 몸에 대한 연구는 시대가 변하여도 끊임없이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1) 김민자, 복식미학강의 2, (서울: 교문사, 2004), p. 14. 

특히 서양 남성복을 통해 고찰할 수 있는 남성몸에 대한 미의식은 당시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미의식과 서로 상통하고 있다. 서양의 복식사를 살펴보면 복식에서 실험적인 시도와 자극적인 의복은 남성들의 몫이었으며, 이것은 몸에 꼭 맞는 바지나 허리를 매우 강조한 짧은 상의를 착용한 데서 알 수 있다.2) 서양복을 연구함에 있어서 이러한 남성복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2) Gertrud Lehnert, 패션, 박수진 역 (서울: 예경, 2005) p. 47.

본 연구의 목적은 서양 남성복에 나타난 남성의 몸 이미지를 고찰해 보는 것으로 연구범위의 시점을 17세기 바로크 시대로 설정하였다. 이 시기의 복식은 화려하고 풍성하며 감각을 현혹시키는 당시의 건축물과 비슷한 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인체의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새로운 인체상을 창조3)하는 등 그 시대 예술 및 건축양식과 더불어 새로운 인체미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로크 양식시대의 복식은 당대의 평가는 좋지 않았으나, 20세기에 들어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현대 패션에서도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은 많은 요소들이 도입되어 나타나고 있다. 

3) Ibld., p. 68.

 따라서 본 연구는 바로크 양식 시대 서양 남성복을 남성의 인체미와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남성복에 내재된 몸에 대한 미적 감각을 설득력 있게 추론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바로크 양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국내외 단행본과 논문, 인터넷 자료를 중심으로 한 문헌연구와 복식이 표현된 회화 및 유물 사진을 활용하여 남성복에 표현된 몸 이미지를 분석하는 실증 연구를 병행하였다. 또한 본 연구는 남성복의 실루엣을 통해서 나타나는 남성 몸의 이미지를 분석하는 연구이므로, 바로크 양식 시대 지배계층의 다양한 아이템 중 남성복 상·하의 겉옷류 만으로 범위를 한정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바로크 시대 서양 남성복과 남성 몸 이미지에 대한 영향력 있는 이론자료가 될 수 있음에 의의를 두고 있다.

Ⅱ. 이론적 배경

1.바로크 양식의 개념 및 시대적 배경

1)바로크 양식의 개념

 17세기를 흔히 바로크 시대라고 한다. 바로크란 ‘일그러진 형태의 진주’를 뜻하며4), 17세기의 미술, 공예가 16세기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조화의 세계에 비해 유동적이며 격정적인 남성적인 감각에 의해 형성된 데서 표출되는 기묘하고 이상한 이미지가 강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5) 바로크라는 용어는 18세기 말의 고전주의 예술이론가들에 의해 17세기 미술이나 건축양식의 장식적이고 기묘한 형태를 나타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18세기의 평론가들은 앞선 시대를 ‘기이하고’, ‘과장되고’, ‘우스꽝스럽다’라고 표현하며 경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6) 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라는 용어에서 ‘변칙, 이상, 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제거되었으며, 미술사, 예술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현재는 이 개념이 다른 예술양식에도 적용되고 있다.

4) NAVER 백과사전, “바로크,” [온라인게시판] ([2010년 2월 15일 검색]); available from World Wide Web@http://100.naver.com/print_100.php?id=68518
5) 千村典生, History of Fasshion, (平凡社, 2003), p. 28.
6) Max von Boeln, 패션의 역사 1, 이재원 역 (서울: 한길아트, 2004), p. 333.

 이에 따라 바로크 양식은 주로 17세기에 가장 부흥하였던 예술양식으로 바로크라는 어원에서 의미하듯이 웅장함, 율동감, 지나치게 화려함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조화와 균형이 파괴된 예술양식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다.

2)바로크 양식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17세기 유럽은 세력이 대등한 독립군주국들이 공존함으로 인해 정치, 경제, 외교 등에 있어서 왕가상호간의 경합정책을 토대로 동맹이 결속되기도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정치적인 동요의 시기였다.7) 이러한 국가 간의 경쟁과 상호교류는 과학의 비약적 발전과 사고의 자유로움을 이끌어냈으며, 인쇄술과 교육의 발전은 국가 간의 폭넓은 소통을 가능케 만들었다.

7) John Nunn, Fashion in Costume 1200~2000, (New Amsterdam Books, 2000), p. 52.

그리고 이때에는 왕권신수설을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한 절대군주에 의해 통치되었던 중앙집권적 국가 시대였다. 이러한 사상에 힘입은 유럽의 군주들은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했으며, 바로크 시대의 문화적 바탕은 왕의 특권과 위신을 드높이려는 목적을 기반으로 한 힘과 권위에서 시작하였다.8) 왕권 확립에 대한 시대적 요청은 예술작품, 복식과 같은 문화적 산물을 통해 표현되었는데, 그 시기의 절대적 권위는 바로크 양식의 특징인 ‘형식의 장대함’으로 표출되었다.9) 

8) 차하순, 서양사총론, (서울: 탐구당, 1992), p. 330.
9) 신주영, “복식에 표현된 시대적 이상미,” 복식 58권 3호 (2008), p. 136, 재인용 Wolfflin, Heinrich, 르네상스의 미술, 안인희 역 (서울: 휴머니스트, 2002), p. 365.

크기로서 강한 인상을 주고자 했던 바로크적 발상은 당시 예술이 목표로 했던 웅장한 양식의 발로가 되었고, 가능한 한 큰 인상을 주어 압도해 버리고 싶은 욕구를 표현하였다. 그 예로 유럽의 기독교 신앙을 담은 그림인 성화(聖畵)를 보면 작품의 크기도 크고 화려하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이러한 미술작품을 사거나 소장할 수 있는 재력은 귀족층밖에 없었으므로 바로크 미술은 카톨릭 신앙을 보급하기 위해 귀족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사조라고 볼 수 있다.10) 이와같이 바로크 양식은 가톨릭국가에서 반종교개혁의 표현 수단으로서 발전했으며, 절대왕정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군주들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화려하면서도 풍요로운 바로크 미술을 이용하기도 했다.11)

10) 김상훈, 통세계사, (서울: 에듀, 2009), p. 136.
11) 김홍섭, 새롭게 읽는 유럽미술사, (서울: 이유, 2003), p. 166.

이처럼 바로크 양식의 시대적 배경은 절대군주로서의 왕권이 강화되었던 시기에 나타났던 예술양식으로 전제 군주의 정신적 가치를 현실의 세계로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모든 사물을 미화하고 장식화시켰으며, 이러한 경향이 건축, 미술, 공예, 음악 등의 예술 전반에서 장중함, 엄숙함, 화려함 등으로 표현되었다. 

3)바로크 양식의 예술적 배경

 예술가들로 하여금 트롱프 뢰유(trompe-l'oeil)의 대조기법, 웅장함 등을 통해서 절제와 평범함을 거부하도록 만든 바로크적 관능성은 극적인 성격과 표현성으로 구별된다.12) 바로크 양식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감동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고도의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바로크 예술양식이 대규모의 종교화를 제작하기 위해 로마에서 태동하여 전 유럽에 퍼져 나갔던 만큼 각국의 교유한 양식과 문화환경에 맞게 변화하였다.13)

12) Frederic Delouche 편저, 새 유럽의 역사, 윤승준 역 (서울: 도서출판 까치, 1995), p. 277.
13) Carol Stricland, 클릭, 서양미술사, 김호경 역 (서울: 예경, 2000), p. 112.

(1)건축
17세기 유럽의 왕과 제후들은 그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자신들이 신권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예술적 효과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건축으로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은 율동감 있는 공간과 입체적 변화가 큰 건축구조가 서로 뒤섞여 회화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14) 바로크 건축양식은 내부를 타원형의 공간으로 형성하고, 벽면과 천정은 조각으로 장식하여 율동감을 표현하고 있다(그림 1). 이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들 수 있는데, 이 궁전은 17세기 전제 군주의 정신적 가치를 현실의 세계로 높이기 위하여 미화하고 장식화한 바로크의 전형적 건축물로써 장중하고 엄숙한 것을 즐겼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위엄을 느끼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15) 이 궁전은 기하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광활한 정원과 호수 등이 적절히 배치됨으로써 궁전과 주변의 환경이 완벽하게 통합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었는데, 이는 왕권을 과시하고 절대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시도로 궁전 건물뿐만 아니라 자연마저도 가하학적 규칙성으로 탈바꿈시킨 것16)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아취형의 높은 창문이 마루턱까지 내려와서 정원과 실내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웅장한 형태와 화려한 조각과 공예품으로 장식되어 있는 베르사이유 궁전은 장엄함과 화려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바로크 양식의 단적인 예라고 말 할 수 있다(그림 2). 

<그림 1> 실내돔장식, ART-A History of paintingžsculpture, architecture-(1979).

<그림 2> 베르사이유궁전, ART-A History of paintingžsculpture, architecture-(1979).

14) 윤정섭, 서양건축사, (서울: 지문당, 1981), p. 227.
15) H.W. 잭슨, 미술의 역사, (서울: 삼성출판사, 1978), p. 496.
16) 김홍섭, op. cit., p. 180.

즉, 바로크 양식의 건축에서는 고전주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평면양식이 아닌 공간의 깊이감이 강조되고 있다. 즉, 건물은 돌출부와 들어간 부분의 벽 주변의 차이감과 창문의 형태 변화와 공간의 차별화를 꽤하고 있으며, 좌우대칭의 개념이 무너진 개방된 형태의 특징을 나타냈다. 

 (2)회화
바로크 미술은 발상지인 로마로부터 각지로 전파되어 남부와 북부 유럽을 격리시키고 있던 양식상의 차이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조류가 되었다.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로 카라바지오(Micha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등을 들 수 있다. 카라바지오는 균형과 절제 같은 고전적 규범이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추하든 아름답든 간에 그대로의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비타협적 사실주의를 추구했다.17) 카라바지오의 회화 작품은 순간의 극적인 부분에 관람자의 주의를 집중하게 하고있으며, 부적절한 표면의 미세한 부분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고 인간 형태를 자연적인 형태에 가장 근접하게 묘사하는 바로크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18) 루벤스는 바로크 미술의 완성자로서 북방민족 특유의 사실풍과 이탈리아풍의 육체 찬미라는 두 경향을 통일하여 당시 궁정취미에 의해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의 독특하면서도 호화롭고, 또한 장대하며 화려한 양식을 완성시켰다. 루벤스는 밝고 풍만한 육체, 풍윤(豊潤)한 색채와 장대한 구성과의 훌륭한 조화, 현실감에 곁든 고대의 종교화, 신화화, 풍경 등에 능하였으며,19) 자연과 초자연, 현실과 환상을 조화시키는 그의 작품은 전성기 바로크 회화의 성격과 양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그림 3).

<그림 3> 십자가를 올림, ART-A History of paintingžsculpture, architecture-(1979).

17) Carol Stricland, op. cit., 김호경 역, p. 114.
18) Bronwyn Cosgrave, The Complete History of Costume & Fashion, (Checkmark, 2000), p. 145.
19) 이영환, 서양미술사, (서울: 박영사, 1979), p. 277.

바로크 양식 시대의 회화는 종교화와 궁전의 장식화, 풍속화 등으로 구분되며, 대부분의 회화작품에서 바로크 양식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과장된 감정 표현과 율동감, 왕족이나 귀족들의 권세를 나타내기 위한 화려한 표현기법20)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바로크 양식 시대 회화의 특징은 율동감, 과장된 감정 표현, 화려한 표현기법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20) 이경성, 미술이란 무엇인가, (서울: 일지사, 1981), p. 166.

 (3)조각
바로크 양식에서 조각은 건축 장식으로써의 성격이 강하다. 조각에서도 바로크 양식은 르네상스의 정연한 완결된 미(美)와는 구별되는 유동적이고 복잡한 자태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21) 17세기 중엽 바로크 미술이 절정에 달하면서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는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극작가, 무대 디자이너로도 활약했다. 번쩍이는 위트와 유머 감각을 지녔던 베르니니는 무대 장식같이 현란한 바로크 미술을 발전시켰는데, 그의 대표작인〈다윗(1623)〉상은 바로크 예술양식의 진수로서 역동적이고 폭발하는 듯한 에너지를 표현하여 보는 이를 작품 속으로 몰입시키는 반응까지도 이끌어 내는 것이 특징이다(그림 4).22)

<그림 4> 다윗상, ART-A History of paintingžsculpture, architecture-(1979).

21) 이영환, op. cit., p. 266.
22) Carol Stricland, op. cit., 김호경 역, p. 117.

 바로크 예술양식은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표현 수단이자 귀족들의 표현수단이기도 하여 화려하고 호신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건축은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 등의 특징을, 조각은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복장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회화에서는 대각선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23), 바로크 양식 시대의 조각은 회화나 건축에 비해 특징적인 면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회화와 마찬가지로 조각에서의 장식이나 비례의 불균형으로 오히려 인간적인 약동감을 느끼게 했다.

23) NAVER 백과사전, “바로크미술,” [온라인게시판] ([2010년 2월 15일 검색]); available from World Wide Web@http://100.naver.com/print_100.php?id=68518

 이와 같은 바로크 예술양식의 화려함과 장중함은 건축, 회화, 조각 이외에도 실내장식, 가구, 무기 등의 공예품에서도 표현되고 있는데, 이 시기의 공예품은 장중함과 화려함의 지나친 추구가 장식과 다로 나타나며, 전체로서의 조화나 재료 본질의 특성이 무시되고, 기품을 잃어버리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24)

24) Alain, 東西文化社, 方坤譯(幸福論, 1977), p. 106.

 〈그림 5〉는 바로크 양식의 예술적 배경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그림 5> 바로크 양식의 예술적 배경.

2.몸 이미지에 대한 개념

 몸에 대한 이상미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문화적 맥락 내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를 표출하는 복식에 대한 이상미의 문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몸에 대한 이상미란 몸과 복식 사이의 문제25)라고 볼 수 있다. 패션은 아주 다양한 소재의 도움으로 육체를 은폐하고 변형한다.26)

25) 김민자, op. cit., p. 14.
26) Gertrud Lehnert, op. cit., 박수진 역, p. 17.

17세기 바로크 양식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타나는 불확정한 법칙, 즉 율동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직선보다 곡선을 주로 사용하고, 또한 곡선을 틀어지고, 당기고, 늦추는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바로크의 본질인 율동감을 기반으로 한 곡선의 예술적 표현을 추구하였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인간에게 감명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는 예술의 힘을 발견함으로써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장식물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가 주는 전반적인 시각적 효과였는데, 이는 바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27) 이와 같은 바로크 양식 감각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우주에 대한 관심으로 유도되었다. 운동감과 절정을 느끼게 하는 공간의 확장과 수축은 건축, 조각, 회화 등 모든 바로크 양식의 기본이었다.28)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의 상류층 서양 남성복의 실루엣의 경우도 곡선을 기조로 이루어진 공간적 구성으로 풍성한 외형을 형성되었으며, 외적 이미지는 동적이며 극적인 바로크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27) 김홍섭, op. cit., p. 167.
28) Douglas A. Russel, Costume and Style in the West, (Prentice Hall, 1983), p. 237.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상류층 바로크 양식 남성복 착장 실루엣을 통해 표현된 조형적 이미지를〈몸 이미지〉라 개념 정리하였다.

Ⅲ. 바로크 양식 시대 남성 복식

 17세기 복식의 경우 세기 전반을 통해서 바로크 예술양식의 성격인 불균형 감각과 동적인 열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으나, 초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가면서 특징이 점차 다르게 표현되었다. 이와같은 특성상 바로크 양식 시대의 복식을 1630년까지의 제1기, 루이 14세의 출현 전까지의 제2기, 그리고 루이 14세 출현 이후의 제3기로 구분29)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루이 14세 출현과 더불어 바로크 양식 시대의 남성복 스타일에 변화가 생겼다고 판단하고, 루이14세 출현 전까지인 전반기와 루이 14세 출현 이후인 후반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29) 元井能, 西洋被服文化史, (光生館, 昭和54年), p. 66.

1.바로크 양식 전반기의 남성 복식

 17세기 전반기의 복식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주름잡았던 스페인 모드에서 벗어나 프랑스 시민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로 변화하였다. 절대왕제를 확립한 프랑스는 루이 13세, 루이 14세 통치하에서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유럽의 권력 중심으로 자리 잡으며, 유럽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에 의해 시민 경제력이 안정된 영국도 프랑스에 대한 대항의식을 가지면서 17세기의 복식과 문화를 이끌어 갔는데,30) 17세기는 활기 있는 에너지가 요구되었던 남성의 시대로 새로운 남성 스타일이 요구되었다.31)

30) 菅原珠子, 佐佐井啓, 西洋服飾史, (朝倉書店, 1996), p. 82.
31) 채금석, 세계패션의 흐름, (서울: 지구문화사, 2007), p. 82.

따라서 17세기 전반기의 상류층 남자 복식의 착장을 통해 표출된 인체미를 고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아이템을 상·하의 겉옷류로 분류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1)상의류

17세기 초반 대표적인 상의 아이템으로 더블릿(doublet)을 들 수 있다. 더블릿은 14~17세기 서양에서 남자들이 착용한 상의를 지칭하는 용어로 ‘두겹으로 겹친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영국에서는 ‘doublet’, 프랑스에서는 ‘푸르뿌엥(pourpoint)’이라 불린 이 복장은 더블릿이란 의미처럼 솜 같은 것을 넣거나, 누비는 것이 특징이었다. 더블릿은 군복에서 유래된 것으로 원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견고한 가죽으로 만들었으나, 평상복의 경우에는 견과 같은 천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표면에 슬래시(slash)라고 하는 안이 들여다 보이게 만든 절개장식 또는 리본장식을 한 것이 많고, 타이트한 소매, 꼭 끼는 몸통부분, 웨이스트 밑에 스커트 같은 짧은 자락이 붙어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기 더블릿은 페플럼이 여러 조각 달린 형태였으나, 1630년 이후에는 소매가 달린 한 장으로 재단된 더블릿이 유행하였으며, 이것이 이후 남성 코트의 시조가 되었다.

 1610년대는 더블릿의 옷 길이가 짧아지면서 허리선이 위로 올라가고 앞중심이 뾰족한 예각이 되었다. 허리선에 연결된 여러 조각으로 된 스커트 부분이 반대로 길어졌다. 초기 더블릿의 소매는 윙 커프스가 달려 있고, 꼭 끼는 것과 팔꿈치까지는 부풀리고 손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것 등이 있었다(그림 6). 1620년대에 더블릿의 허리에는 좁은 장식용 벨트를 하기도 하였다(그림 7, 8).32) 1630년대부터 1640년대에는 더블릿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더블릿의 허리선과 스커트 부분의 연결선과 뒷부분에 약간의 슬래시가 들어가 거의 직선 형태로 헐렁하고 활동하기 편한 스타일이 되었다.33) 옷길이가 더욱 짧아지자 더블릿을 바지와 연결하여 착용하는 방법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더블릿의 단추를 윗부분만 여미고 아랫부분은 오픈시키는 착장 방법이 나타났다. 오픈된 부분부터 셔츠의 가슴장식에 있는 리본이나 레이스 쟈보(jabot)가 보이기도 했다. 소매는 윙(wing)이 달려 있었고, 팔에 전체적으로 슬림하게 붙는 형태, 팔꿈치까지는 부풀리고 손목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 슬래시가 있는 형태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그림 9~11). 이 당시 더블릿의 특징으로 가슴 위, 어깨, 위팔부근의 수직선의 슬래시를 들 수 있는데, 이 슬래시들 사이로 셔츠가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착장 방법이었다.34) 그리고 1650년대 이후 나타난 더블릿은 옷 길이와 소매길이가 짧아져서 허리와 소맷부리가 밖으로 보이게 되었다(그림 13~15).

<그림 6> 1616년. Richard Sackvill.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1997).

<그림 7> 1629년. Charles Ⅰ세. History of Costume(1965).

<그림 8> 1629년. Hamilton 공작.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1997).

<그림 9> 1631년. Henry Ⅱ세.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1997).

<그림 10> 1635년. Charles Ⅰ세. Costume History and Style(1983).

<그림 11> 1640년. Henry Rich.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1997).

<그림 12> 1643년. Jean Louis 14세. A Complete History of Costume & Fashion(2000).

<그림 13> 1650년대 중반. 남성복. A History of Fashion(1990).

<그림 14> 1650년. William Ⅱ세. Costume History and Style(1983).

<그림 15> 1650년대. 남성복. 삼성디자인 넷.

32) 菅原珠子, 佐佐井啓, op. cit., p. 82.
33) John Nunn, op. cit., p. 54.
34) Blanche Payne, History of Costume, (Harper & Row, 1965), p. 332.

 이와 같은 더블릿의 변화는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영국, 독일에까지 널리 확산되었으며, 독일에서는 소매가 없거나 노루나 물소 가죽 등을 소재로 한 특이한 형태의 더블릿이 나타나기도 했다.35) 17세기 전반에 상류층 남성복 상의는 전 시대부터의 더블릿을 주체로 한 복장 형식이 바로크다운 자유로운 스타일로 변형36)되었고, 후반에는 다음시대까지 지속된 새로운 코트 형식의 복장을 성립시켰다.

35) 菅原珠子, 佐佐井啓, op. cit., p. 84.
36) Ibld., p. 82.

2)하의류

 17세기에 초기의 하의류는 실용을 추구하는 네덜란드의 영향으로 패드와 슬래쉬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넉넉한 반바지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무릎 밑에서 여며지는 반바지류를 영국에서는 ‘니 브리치즈(knee breeches)’라 불렀으며, 프랑스에서는 ‘오 드 쇼오스(haut de chausses)’라고했다. 더블릿의 허리부근에는 여러 개의 리본 다발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바지인 니 브리치즈(kneebreeches)를 상의에 고정시키기 위한 여밈 금속이 달린 리본다발로 더블릿의 몸판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 앞뒤쪽에서 리본형 태로 고정하였다.

 바로크 양식 초기의 하의류는 대퇴부 중간 정도 길이의 짧은 바지형태로 바지를 부풀리기 위해 심을 넣는 대신 두꺼운 겉감과 안감을 사용하여 약간 자루 모양으로 부풀려진 바지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그림 6). 그러나 중상류층에서는 무릎 아랫길이의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으며, 무릎 아래에서는 넓은 폭의 리본으로 매듭진 바지(그림 7)가 유행하였으며, 이 형태가 점차 귀족들에게 상향 전파되었다. 1630년대에는 바지 밑단이 넓어지고 그 단을 따라 리본으로 매어 장식하는 레이스 무릎장식인 카농(canons)이 등장하여 독특한 형태를 표현하였다(그림 9~11).37) 1630년대 이후 더블릿 길이가 짧아지면서 하의류는 오히려 길어지고 실루엣이 직선 형태로 변하였으며, 바지허리의 주름은 없어지고 리본장식을 하였다. 바지허리의 연결방법은 1650년대까지는 더블릿에 링을 달고 바지허리에 후크를 달아서 후크를 링에 걸어 입었으나, 1660년대 이후에는 더블릿에 연결하는 형태는 사라지게 되었다.

37) Ibid., p. 85.

1630년대와 1640년대의 니 브리치즈는 다리에 꼭 맞는 스타일, 풍성한 스타일 등 여러 형태가 병행하면서 유행했다. 길이는 15cm에서 20cm까지 내려와 바지형태가 되고 그 끝은 리본으로 묶었다. 이렇게 모양이 변하면서 당시에 착용한 바지의 명칭을 퀼로트(culotte), 트루스(trousse), 판탈롱(pantaloon) 등으로 불렀다(그림 13~16). 이처럼 바로크 양식시대 전반기의 지배계층 남성복 겉옷으로는 대표적으로 상의인 더블릿, 무릎 정도 길이의 일반적인 남성 하의류인 니 브리치즈 등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6> 1655년. Gustave Adolph 왕자. History of Costume(1965).

전반기의 바로크 양식 경향은 복식에도 반영되어 16세기의 복식에 비해 확대된 실루엣, 러플이나 프릴 등의 과도한 장식으로 나타났다.38)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정적이고 부동적인 양식은 17세기에 들어 점차 불규칙하며 율동적인 모습으로 진화되었으며, 장식 과잉으로 인한 복잡성과 장식 모티프 등의 배치로 인한 물결치는 듯한 곡선과 남성적인 호화스러움, 유동적인 동감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38) 채금석, op. cit., p. 81.

2.바로크 양식 후반기의 남성 복식

 바로크 양식 후반기는 태양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의 친정시대로 그의 예술문화 강화 정책에 따라 프랑스의 수공업이 급속히 발전하여 유럽의 주도권을 잡았던 때이기도 하다(그림 12). 이에 따라 프랑스는 패션은 물론, 언어와 요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의 중심으로서 전 유럽의 상류계급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39) 17세기 후반에는 ‘패션의 창조자’라고 명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모드’, ‘모던’이란 단어가 생겼고, 이때부터 프랑스는 ‘모드의 왕국’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 명맥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그대로 정착되었다.40)

39) 千村典生, op. cit., p. 30.
40) 鷹可綸子, 服裝文化史, (朝倉書店, 1991), p. 158.

 이 시기의 상류층 남자 복식의 착장을 통해 표출된 인체미를 고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아이템을 상·하의 겉옷류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1)상의류

 17세기 초반 유행했던 더블릿은 1650년대 이후 볼레로 스타일로 그 형태가 점점 작아졌으며(그림 9), 1670년대에는 쥐스토코르(justaucorps)로 대체되었다. 쥐스토코르 아래는 조끼 형태인 베스트(veste: 소매가 달림)를 입었으며, 랭그라브 대신에 반바지인 퀼로트(culotte)를 착용하고, 넥타이의 초기형태인 크라바트(cravatte)를 목에 둘렀다.41)

 41) Ibid., p. 71.

 쥐스토코르는 프랑스어의 ‘juste au corps’, 즉 동체가 꼭 맞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었으며, 본래 군인들이 착용했던 캐삭(casaque(프), cassock(영))이라고 하는 외투에서 파생되었다고 전해진다.42,43) 쥐스토코르는 허리를 강조한 형태로 베스트보다 단순한 형태였다. 또한 베스트는 왕과 몇몇 귀족들만 화려한 자수를 놓았으며, 그 외의 사람들에겐 자수가 금지되었다. 소매는 위가 좁고 손목으로 내려올수록 넓어졌으며, 커프스 대신 화려하게 수 놓아진 얇게 접히는 소매단을 달았다.44)

42) 原田二郞, 西洋服裝史, (原流社, 1976), p. 131.
43) John Nunn, op. cit., p. 58.
44) Gertrud Lehnert, op. cit., 박수진 역, p. 69.

쥐스토코르는 길이가 긴 코트풍의 실용적인 겉옷으로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입게 되면서 부터 형태나 소재가 다소 변하였다. 이 때 프랑스에서는 자수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루이 14세는 1662년에 쥐스토코르 브레베(justaucorps brevet: 인가받은 쥐스토코르)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이 브레베를 받은 사람은 금은 자수가 놓인 붉은 안감을 댄 푸른 쥐스토코르를 입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이러한 차림새는 특별한 초대장 없이도 어느 곳이나 국왕을 동반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었다.45) 이러한 특별한 쥐스토코르 제도는 수년 후 폐지되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쥐스토코르는 귀족복에서 시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45) Max von Boeln, op. cit., 이재원 역, p. 372.

1690년대의 쥐스토코르는 가슴 부분의 폭이 좁아지고 옷단이 넓어진 곡선 형태로 제작되었다. 밑단은 견고한 옷감을 안쪽에 대어 플레어(flare)지게 하였으며, 소매길이도 손목까지 길어졌다. 소매부리와 가슴부분에는 레이스 프릴이나 장식 쟈보가 보였으며, 이와 같은 형태로 정착된 쥐스토코르는 베스트나 퀼로트와 조화를 이루며 착용되었다(그림 16).46) 앞트임에는 단추와 단춧구멍을 촘촘히 달아 장식하고 금·은과 비단으로 만든 끈을 액세서리로 했는데, 이 끈 장식은 상류층의 지위와 경제적인 부를 상징하는 장식으로 간주되었다. 귀족들의 사치로 인해 쥐스토코르가 지나치게 화려해지자 사치금지령이 발표되고, 이로 인해 쥐스토코르 안에 착용했던 베스트는 화려해지고 쥐스토코르는 수수해졌다. 베스트는 푸르뿌엥을 대신하는 아이템으로써, 쥐스토코르 아래 입거나 실내에서 입었다. 형태는 쥐스토코르와 상당히 비슷하지만, 한층 작았으며, 거의 무릎길이이고 상반신은 몸에 꼭 끼게 앞여밈에 단추를 달았다. 귀족들은 귀족계급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긴 가발인 알롱쥐를 길게 늘어뜨리고 목에는 크라바트와 긴 리본을 매었으며, 쥐스토코르의 소맷부리에는 레이스의 프릴이 보이게 하였다(그림 23).47)

46) 菅原珠子, 佐佐井啓, op. cit., p. 91.
47) 채금석, op. cit., p. 86.

2)하의류

 17세기 남자 복식을 고찰하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논쟁이 되었던 의문점은 당시 남자들이 실지로 스커트를 착용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1650년대 유행했던 랭그라브(rhingrave)라는 하의 때문이었는데, 페티코트 브리치즈(petticoat breeches)라고도 불리던 랭그라브는 다리 사이즈의 한배반 정도의 넓은 폭에 다리 형태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주름이 잡힌 디바이디드(divided) 스커트 형태를 보이고 있다. 랭그라브는 사치스러운 취향의 형태로 환상적이리만치 비남성적인 의상이었다.48)

48) Blance Payne, op. cit., p. 340.

프랑스의 랭그라브는 17세기 후반 영국에 전파되면서 궁정이나 귀족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었으며,49) 허리둘레와 밑단 양옆에 화려한 색의 리본 다발을 붙여서 17세기 과장된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되었다.50) 처음에는 남성들이 랭그라브를 착장하였을 때 실루엣은 다이아몬드형을 이루는 모습이었으나, 차츰 그 형이 무너지면서 다양한 모습이 나타났다(그림 17~20).51)

49) NAVER 용어사전, “랭그라브” [온라인게시판] ([2011년 1월 19일 검색]); available from World Wide Web@http://terms.naver.com/item.nhn?dirId=2613&docId=13763
50) 신상옥, 서양복식사, (서울: 수학사, 2006), p. 180.
51) 原田二郞, op. cit., p .120.

1660, 70년대에는 랭그라브 또는 니 브리치즈 등 하의류를 무릎에서 여며지게끔 카농이나 포트 카농(port canons)과 함께 착용했으며, 무릎아래에 폭넓은 프릴 장식이나 리본 다발로 장식하는 등52) 의복의 장식이 극에 달했다.

52) John Nunn, op. cit., p. 61.

 프랑스의 루이 14세 때에는 복식과 정치가 심오한 관련이 있었는데, 루이 14세는 귀족들이 복식에 사치를 하게끔 일부러 조장하여 지출을 유도함으로써 군사력을 약화시키게 하는 정치적 수완을 펼쳤다. 그 예가 프랑스 복식에 표현된 대표적인 특징이 리본다발 장식이었다.53) 17세기 중반 이후 루이 14세의 개인적인 취향은 패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1678년부터 서서히 랭그라브가 사라지는데, 이는 화려함과 쾌락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질서와 엄격함 그리고 위엄이 그때부터 치세가 되었다.54)

53) 元井能, op. cit., p. 71.
54) Francois Boucher,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 (Thames & Hudson, 1987), p. 260.

 바로크 예술양식에서 나타났던 불균형과 과잉장식이 17세기 후반 남자 복식에 공통적으로 나타났는데55), 이것은 후반기 지배계층의 겉옷인 쥐스토코르와 랭그라브를 통해 가시적으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55) 菅原珠子, 佐佐井啓, op. cit., p. 88.

Ⅳ. 바로크 양식 남성복에 나타난 몸 이미지의 특성

본 연구에서는 Ⅱ장과 Ⅲ장의 내용을 토대로 17세기 서양 남성복에서 나타난 몸 이미지를 밀착에 의한 인체 노출과 인체 은폐에 의한 구축적 표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1.밀착에 의한 인체 노출

 바로크 양식은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에서 분출하는 자유분방함이 율동감을 나타내는 곡선의 예술적 표현으로 추구되었다. 특히 17세기 복식에 표현된 바로크 스타일은 스케일이 크게 확대되고 복합적이며 다채롭다. 굽이치는 물결모양의 곡선이 동적인 느낌을 주며, 눈부시게 화려한 장식은 불꽃처럼 정열적이고 요염한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몸에 밀착된 겉옷 착장에 의해 드러나는 남성의 신체 실루엣은 관능미를 표현하기도 했다. 바로크 양식 시대의 남성 복식은 이전에도 드물었고 결코 다시 나타난 적이 없을 정도의 과장된 형태로 발전하였다.56) 17세기 초 남성복 형태는 완전히 왜곡되어 극소화 경향을 보였다. 더블릿은 앞이 여며지지 않을 정도로 품이 작아졌으며, 길이도 짧아졌다. 또한 소매도 반팔 정도로 짧아졌다(그림 7~10). 이 형태는 ‘아동재킷’이라 불렸으며, 동시에 바지도 좁아지고 밑단은 넓게 펼쳐진 형태가 잠시 유지되었다.57) 상의길이가 짧아지고 타이트해지면서 남자들의 허리부터 엉덩이까지의 형태가 드러나며 자연히 하반신 실루엣이 노출되었다(그림 13~16). 남성의 엉덩이부분은 남성의 신체 중 유일하게 곡선을 이루는 곳으로 에로틱 존(erotic zon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엉덩이 형태를 드러내는 15세기 타이트한 유럽의 재킷과 호즈는 도덕가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58) 17세기 후반에 귀족들이 착장했던 쥐스토코르는 몸에 밀착된 입체의복으로 현대남성복 형태에 근접한 발전된 기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59)

56) Max von Boehn, op. cit., 이재원 역, p. 365.
57) Ibid., p. 365
58) 이미선, 김민자, “남성의 몸과 패션에 표현된 미적 이미지(1),” 복식 51권 1호 (2001), p. 170.
59) 김양희, “17세기 말~18세기 말 프랑스 남자 쥐스토코르 유행변화와 패턴제작 연구,” 복식 59권 8호 (2009), p. 50.

 1660년대 남성복 실루엣은 튜브형의 직선적인 실루엣이었으며, 옷 길이는 무릎길이에 칼라가 없는 라운드 네크라인이었으나, 허리를 가늘게 조여 몸에 꼭 맞는 날씬한 S자형 실루엣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허리부분에서 아랫단이 넓어지고 길이가 길어지면서 뒤중심과 옆선에 트임이 생겼으며, 고급스럽고 화려한 색상의 벨벳이나 금은사를 넣어 짠 실크 등에 레이스, 자수, 단추를 사용하여 호화스럽게 장식하였다. 특히 쥐스토코르는 그 형태가 S자형 실루엣으로 변하면서 전체적인 실루엣만으로 계급간의 차별화를 확연하게 한 남성복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 21, 22).

 밀착된 상의 착장으로 인해 나타난 남성의 인체미는 남성들의 성을 강조하였으며, 동시에 바로크 양식에서 보여지는 불균형한 과장미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17세기 전반기는 남성복 하의류의 변화를 통해서도 밀착에 의한 인체미를 고찰할 수 있는데, 하의류 중 과장된 형태의 멜론형태의 바지는 1630년에 완전히 사라지고 무릎 바로 위에서 폭이 넓은 나비매듭으로 묶거나 여러 개의 좁은 폭으로 리본을 매는 무릎길이의 몸에 꼭 맞는 브리치즈가 등장했다.60) 이것은 상의가 짧아지면서 밀착된 브리치즈의 착장 실루엣을 통해 귀족적인 인체미를 과시했던 것이다. 또한 1650년 이후 남성들의 더블릿이 볼레로처럼 짧아지면서 셔츠가 노출되었는데, 셔츠의 몸판과 소매는 동일한 색상이거나 대조되는 색상으로 그 길이는 다양했는데, 이때는 대담하게 색을 대조시키거나 장식을 비대칭구성61)을 함으로써 인체 실루엣을 더욱 강조하였다(그림 13, 18).

60) J. Anderson Black and Madge Garland, 세계패션사 1 개정판, 윤길순 역 (서울: 자작아카데미, 1997), p. 229.
61) Ibid., p. 225.

 바로크 양식 남성복에서 밀착에 의한 인체의 노출은 주로 17세기 전반기의 복식에서 주로 고찰할 수 있었는데, 짧아지면서 타이트해진 더블릿과 니브리치즈의 착장은 남성성을 강조하는 에로틱 이미지, 신분 차별을 확실하게 하는 귀족적인 이미지로 분석될 수 있었다.

 신체의 직접적인 노출이 아닌 의복을 몸에 밀착시킴으로써 나타나는 선의 노출은 근세 서양 남성복의 역사를 통해서도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남성의 성 이미지를 강조하는 에로티시즘의 표출로 볼 수 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소재를 통해서 의상을 몸에 밀착시키면서도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남성복 디자인의 발전 속에서 성 이미지의 변화를 함께 고찰할 수 있다.

2.인체 은폐에 의한 구축적 표현

 바로크 양식 시대의 패션은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육체 표현에서 벗어나 원래의 형태와는 무관하게 인체를 과장된 형태로 표현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크 양식적 관념에 비추어 볼 때 인체의 노출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감각을 현혹시키기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졌으므로, 항상 새로운 인체상을 창조하는 데 주력했던 바로크 양식62)은 정상적인 인체보다는 인체의 극적 변화와 표현을 추구하는 등 인체의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복식 우선형패션63)으로 나타났다.

62) Gertrud Lehnert, op. cit., 박수진 역, p. 67.
63) 김민자, op. cit., p. 73.

 17세기 중반 이후 남성복은 형태를 통해서 인체를 은폐하려는 구축적 표현 방법과 과장된 장식으로 인체를 은폐하여 나타나는 구축적인 표현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중 의복의 형태를 통해 인체를 은폐함으로써 새로운 남성 몸 이미지를 표현했던 대표적인 아이템으로 쥐스토코르를 들 수 있다. 바로크 양식에서 보여지는 ‘불균형’과 ‘과도한 장식’은 당시 남자 복식에 나타나는 공통된 요소였는데, 1660년대에 쥐스토코르를 중심으로 이러한 스타일이 확산되었다.64) 쥐스토코르에서는 밀착과 은폐의 구성요인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1680년 이후 직선적이었던 실루엣이 아래로 점점 확장되어 A라인을 이루며 소매가 좁아지면서 밑단에서 급격하게 확장되어 접어 입음으로써 커프스 형태를 이루 형태65)를 보이는 쥐스토코르를 통하여 고찰할 수 있다. 즉, 이처럼 과장된 실루엣의 확장은 실제 인체 형태의 은폐를 통한 구축적 이미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 21~23). 1680년경 남성복 착장에 중요한 아이템이었던 쥐스토코르는 겉면에는 화려한 자수 장식을 하고, 팔꿈치에서 넓게 접힌 소매에는 레이스 커프스를 달아 과장되게 장식하였다. 또한 쥐스토코르를 장식했던 과도한 띠와 리본 장식은 1690년경에는 유행에서 사라졌지만, 레이스 크라바트와 커프스의 유행은 지속되었다.66)

<그림 21> 1680년. Jean Louis 14세. History of Costume(1965).

<그림 22> 1694년. 남성복.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1997).

<그림 23> 1695년. Frederick Ⅳ의 Justaucorps. History of Costume(1965).

64) 菅原珠子, 佐佐井啓, op. cit., p. 89.
65) 김양희, op. cit., p. 51.
66) Max von Boeln, op. cit., 이재원 역, p. 370.

 서양 남성복에서 16세기 중엽 이후에 등장한 부피가 큰 복장은 원래 무장하기 위해서 호신의 의미로 패드를 넣었던 것에서 유래하였는데, 일반인들에게는 귀족사회의 권위, 위엄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며, 귀족에 대한 선망으로 옷을 극단적으로 과장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그림 12).67) 17세기 중반 이후 남성복의 주요 아이템이었던 쥐스토코르는 구성형태, 그리고 무게감 있는 직물 사용으로 실제 인체 형태가 은폐되는 과장된 실루엣을 형성하여 남성적인 권위와 위엄, 그리고 귀족적 이미지를 표현하였다. 당시 전반적인 예술분야가 풍요로운 장식을 통해 구조적인 실루엣을 형성했던 것처럼, 17세기 중반 전체적인 남성복 착장은 전체적으로 의상이 부분적으로 겹쳐져 다이아몬드 형태의 실루엣으로 표현되는68) 인체 은폐에 의한 건축적인 이미지로 나타났다(그림 19, 20).

<그림 19> 1670년. 남성복. History of Costume(1965).

<그림 20> 1673년. Costume History and Style(1983).

67) 최해주, “고대서양복식의 표현양식에 관한 연구,” 기초조형학회지 5권 2호 (2004), p. 280.
68) Douglas A. Russell, op. cit., p. 256.

 17세기 후반 남성복에서 과장된 장식을 통해 인체를 은폐하여 나타나는 구축적인 이미지의 예로는 갈랑(galant)이라고 불리는 리본장식 다발을 들 수 있다. 1660년경 나타났던 랭그라브는 프랑스에서 특히 유행하였는데, 엄청난 양의 리본 다발로 장식69)되었으며, 당시 여성 복식을 압도할 정도로 호화로웠다.70) 1650년 짧은 더블릿이 등장하면서 랭그라브와의 조합은 새로운 모드가 되었다. 더블릿과 랭그라브의 윗부분에 폭넓은 리본 장식을 달았으며, 허리 양쪽과 무릎부위, 허리밴드에도 엄청난 양의 리본장식이 달렸다. 루이 14세는 화려한 리본장식에 폭이 넓고 짧은 스커트처럼 보이는 랭그라브를 특히 선호하였는데, 그러한 과잉 장식을 선호하는 취향이 궁정에서 유행을 하게 되면서 리본의 유행은 더욱 확산되었다.71) 이렇게 랭그라브의 과잉 장식은 실제 인체형태와는 상관없는 인체 은폐를 통해 계급의식을 뚜렷하게 차별화시키는 신체미를 표현하였다(그림 17, 20). 그러나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랭그라브는 당시의 예술양식에서 보였던 감각처럼 루이 14세 때의 장식적인 액세서리 보다는 전체적으로 구축적인 실루엣 구성에 비중이 두어졌다. 이때 남성복 형태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웠을지라도 삼각형 구도로 연결된 형태를 추구72)하였는데, 이를 통해 남성복의 구축적 이미지가 확연하게 나타났음을 인지할 수 있다.

<그림 17> 1663년. 스위스 대사를 맞이하는 Jean Louis 14세.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1997).

<그림 18> 1663년. John Granvill. A History of Costume in the West(1997).

69) Ibid., p. 243.
70) 元井能, op. cit., p. 67.
71) J. Anderson Black and Madge Garland, 패션의 역사(하), 山內沙織역 (서울: PARCO 출판, 1985), p. 44.
72) Douglas A. Russell, op. cit., p. 256.

 의복의 구성요소가 아닌 장식의 역할을 하는 레이스, 리본 등의 장식은 의복의 표면에서 율동감과 입체감을 주어 부피감을 느끼게 한다.73) 특히 바로크 양식의 남자 복식은 태슬, 루프, 레이스, 자수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고, 패드, 퍼프, 슬래쉬를 사용한 복잡한 구성과 과장으로 부피가 큰 실루엣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근접할 수 없는 남성들의 위엄과 귀족풍의 분위기를 나타내려 한 것이었다.74) 또한 과다한 장식적 모티브로 인해 절대 비례가 허물어져 인체와 복식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유동성을 지닌 불명확성을 나타내고 있다.75)

73) 장성은, “뵐플린의 양식사적 관점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복식의 양식 비교,” 복식 57권 7호 (2007), p. 25.
74) 박춘순, 서미영, 서혜진, 조은영, “바로크 남녀의복의 장식 연구,” 충남생활과학연구지 17권 1호 (2004), p. 65.
75) 장성은, op. cit., p. 28.

 즉, 17세기의 남성복에서 볼 수 있는 과잉 장식은 남성적 이미지를 의복으로 구축적인 실루엣을 형성함으로써 힘과 권력 그리고 남성의 우월함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바로크 양식의 남성복에서는 형태에 의해 인체를 밀착시켜 나타나는 노출과 은폐하는 착장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또한 과잉 장식과 과장된 기하하적 실루엣에 의해 은폐된 착장을 고찰할 수 있었다. 즉, 타고난 인체 실루엣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의복으로 본래의 실루엣을 드러내거나 은폐하는 과장된 의복 형태를 통하여 당시 남성들은 사회적인 우월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시대에 대한 해학적인 관능미를 보여주었다.

 17세기의 남성 복식은 어떻게 패션이 과잉 장식에서부터 아주 단순함까지 빈번하게 바뀔 수 있는지, 그리고 종교적인, 정치적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복식의 색상이나 장식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으로 흥미로운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24〉는 바로크 양식 남성복과 조형적 인체미의 관계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그림 24> 바로크 양식 남성복과 조형적 인체미의 관계

Ⅴ. 결 론

 서양 남성복을 통해서 고찰할 수 있는 남성 몸에대한 미의식은 당시 조형예술에서 나타나는 미의식과 서로 상통하고 있으며, 서양복을 연구함에 있어 남성복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그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바로크 양식 시대 상류층 남성복을 남성의 인체미와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관점에서 분석하여 남성복 착장에 표현되는 인체에 대한 미적 감각을 설득력 있게 추론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바로크 양식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타나는 불확정한 법칙, 즉 율동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형체로 표현하면 직선보다 곡선을 사용하였고, 또한 곡선을 틀어지고, 당기고, 늦추는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바로크의 본질인 율동감을 기반으로 한 곡선의 예술적 표현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7세기 복식에 표현된 바로크 양식은 굽이치는 물결모양의 곡선이 동적인 느낌을 주며, 눈부시게 화려한 장식은 불꽃처럼 정열적이고 요염한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7세기 서양 남성복에서 나타난 몸 이미지를 밀착에 의한 인체 노출과 인체 은폐에 의한 구축적 표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첫째, 밀착에 의한 인체 노출의 경우는 주로 17세기 전반기의 상류층 남성복 착장에서 고찰할 수 있었다. 짧고 타이트해진 더블릿과 니 브리치즈의 착장은 남성성을 강조하는 에로틱 이미지, 신분차별을 확실하게 하는 귀족적인 이미지로 분석될 수 있었다. 신체의 직접적인 노출이 아닌 의복을 몸에 밀착시킴으로써 나타나는 선의 노출은 근세 서양 남성복의 역사를 통해서도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남성의 성 이미지를 강조하는 에로티시즘의 표출로 볼 수 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소재를 통해서 의상을 몸에 밀착시키면서도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남성복 디자인의 발전 속에서 성 이미지의 변화를 함께 고찰할 수 있다.

 둘째, 은폐에 의한 구축적 표현의 경우 17세기 중반 이후 상류층 남성복 착장에서 고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의복 형태를 통해서 인체를 은폐하여 나타나는 이미지와 과장된 장식으로 인체를 은폐하여 나타나는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남성복의 대표적인 겉옷인 쥐스토코르의 착장에서는 의복 형태에 의해 인체를 밀착시켜 생기는 노출과 실제 인체를 은폐하는 구축적 이미지를 동시에 고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 남성복 착장의 대표적인 하의인 랭그라브와 더블릿, 쥐스토코르의 모습에서는 과잉 장식에 의한 은폐된 착장을 고찰할 수 있었다. 즉, 타고난 인체 실루엣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의복으로 본래의 실루엣을 드러내거나 은폐하는 과장된 의복 형태를 통하여 당시 남성들은 사회적인 우월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시대에 대한 해학적인 관능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17세기의 남성복에서 볼 수 있는 과잉 장식은 남성적 이미지를 기하학적이며 구축적인 실루엣을 형성함으로써 힘과 권력 그리고 남성의 우월함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바로크 양식 시대에는 순수한 인체 노출만으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감각을 현혹시키기 충분치 못하다고 여기며, 항상 새로운 인체상을 찾는데 주력했던 시대였으며 이러한 노력이 바로크 시대에 가장 명확해졌다는 선행 연구를 본 연구의 결과에서 설득력 있게 분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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