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ntroduction
조선시대 공장(工匠)은 일반적으로 전업적 수공 업자를 말하고, 구체적으로는 공조(工曹), 각 관서 (官署), 각도 및 각읍 소장의 공장(工匠) 성적(成籍) 에 등록된 자를 말한다. 공장들 가운데 다회장(多繪 匠)은 각종 끈목을 짜던 장인들로, 경공장(京工匠) 에 편성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 기능을 갖춘 장인이 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복식을 비롯한 사회 전반 의 문화가 현대화되면서 전통 다회의 사용이 축소 되었으며, 다회는 주로 매듭의 소재로만 여겨져 매 듭장이 짜서 매듭을 맺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한정 되었다. 때문에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에서도 ‘매듭 장’은 1968년 정연수 선생을 최초 보유자로 인정하 는 것을 필두로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으나, ‘다회 장’은 인정되지 못하여 전승이 단절된 상태이다.
다회가 매듭의 일부분 혹은 일부 공정으로만 인 식되는 현상은 학계의 선행연구에서도 나타난다. 지금까지 다회 관련 선행연구는 학위논문, 학술지, 단행본 등 대략 40여편이 있다. 이들 선행연구의 일부는 학위논문을 재정리하여 학술지에 게재한 것 도 있다. 이를 감안하더라고 다회 관련 선행연구의 수량을 적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선행연구의 대부분은 ‘매듭’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다회 자체를 다룬 연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Park and Choi, 2013). 즉, 매듭의 역사와 특징, 제직 기법 등 은 비교적 상세히 연구되었으나, 다회의 역사나 제 직 기법, 엮는 도구, 그리고 다회장 자체에 대한 연 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이상과 같은 다회 관련 선행연구경향을 염두에 두고, 본 연구는 아래 두 가지 연구목적을 설정하였 고, 각각의 연구내용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 각 기관에 편성되어 있는 다회장의 분포 를 살핀다. 세부적으로 다회 관련 장인의 명칭과 소속 관서, 인원, 근무 형태, 평가와 승급 등을 파악 한다. 분석 대상은 조선시대 법전으로 한정한다. 둘 째, 다회 관련 장인들이 사용한 도구의 명칭을 파 악하고, 그 형태와 사용법 등을 유추한다. 연구를 위해 고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서를 비롯한 각종 문헌(의궤, 등록, 발기, 홀기, 전례서, 정례, 법 전, 백과전서, 문집 등) 총 716종을 조사하였는데, 그 중 총 394종의 문헌에 다회 관련 내용이 수록되 었음을 확인하였고, 특히 다회 관련 장인의 도구는 주로 의궤에 기록되었음을 파악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다회 관련 도구가 명시된 1605년(선조 38)부터 1906년(광무10)까지의 약 50종 의궤를 주 된 분석 자료로 삼았다. 다만, 의궤에는 도구의 명 칭만 기록되었을 뿐, 구체적인 형태를 제시하지 않 았고, 세부 소재 역시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현대의 매듭장들이 다회를 칠 때 사용하는 도구를 조사하여 의궤에 기록된 도구의 형태와 사용법 등 을 유추해 보고자 한다. 의궤의 도구는 다회장에 한 정하지 않고 매듭장까지 포함하여, 다회장과 매듭장 의 도구를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다회장과 그들이 사용한 도구, 제작 물품 등에 관해 전반적인 파악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II.Spread of Dahoejang
조선시대의 다회장은 기본적으로 「경국대전(經 國大典)」(1485년)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조선전기 에 「경국대전」을 통해 완성된 법체계는 조선후기 에 여러 차례의 수정, 보완을 거치며 「전록통고(典 錄通考)」(1706년), 「대전통편(大典通編)」(1785년), 「대전회통(大典會通)」(1865년) 등으로 편찬된다. 그 러나 장인의 명칭과 인원을 보면 「대전회통」까지 「경국대전」의 기본 틀을 유지한다. 따라서 아래에 서는 「경국대전」의 내용을 기초로 조선시대 다회 관련 장인에 관해 법적으로 규정된 내용을 파악하 고자 한다.
「경국대전」은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으로 나눠, 각종 법령을 집대성하였다. 법령을 통해 다회 관련 장인 의 명칭뿐만 아니라, 그들의 근무형태와 승급 등 여러 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1.The name & the number of persons of handicraftsman related to Dahoe
다회 관련 장인의 명칭과 인원은 공전 ‘공장 (工匠)’ 조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장인은 근무지에 따라 중앙인 한성의 관청에 소속된 경공 장(京工匠)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된 외공장(外工匠) 으로 나눠서 편성된다. 경공장은 129종 2,841명이 고, 외공장은 27종 3,652명으로, 공식적으로 총 6,493 명의 장인이 있었다. 이 중 다회 관련 장인은 경공 장에만 있고, 외공장에는 없다.
다회와 관련되는 장인은 <Table 1>에 정리된 것 처럼 다회장(多繪匠), 매듭장(每緝匠), 합사장(合絲 匠), 연사장(練絲匠)의 4종이 있다. 다회장은 끈목 을 짜는 장인이고, 매듭장은 이 끈목을 엮어 모양 을 내는 장인이다. 합사장은 다회를 짤 때 쓰는 실 을 합사하는 장인이고, 연사장은 실을 정련하는 장 인이다. 여기서 합사장과 연사장은 다회용 실만 다 룬 것이 아니라, 의복을 만들거나, 자수를 놓기 위 한 모든 실을 다루었을 것이므로, 이들이 작업한 실의 일부만 다회에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장인은 다시 각 관서별로 소속이 구별되고, 인원 도 규정된다. 다회장은 공조 본조(本曹)에 2명, 상 의원(尙衣院)에 4명, 전설사(典設司)에 6명이 소속 되었다. 매듭장은 공조 본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이 소속되었다. 합사장은 상의원에 10명, 연사장은 상 의원에 75명이 소속되었다. 따라서 총 4종의 유형 에 총 103명의 장인이 다회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 된 일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중 다회장과 매듭장은 공조 본조, 상의원, 전설사의 세 기구에 소속된 총 18명이 있었다(Gyeonggukdaejeon, volume 6, Gongjeon Gongjang).
2.Working system, status, rank
조선시대의 장인은 명부(名簿)를 만들어 각각 관 리되었고, 일정하게 정해진 근무 형태가 있었으며, 장인이 될 수 있는 신분과 근무할 수 있는 나이에 대한 제한도 있었다.
“경공장과 외공장은 명부를 만들어 공조 본조, 소속 관사, 소속 도(道), 소속 읍(邑)에 비치한다(사 천(私賤)은 소속시키지 못하고, 나이 만 60세가 되 면 역(役)을 면제한다(京外工匠成籍, 藏於本曹․本 司․本道․本邑.【私賤勿屬, 年滿六十除役.】).”
(Gyeonggukdaejeon, vol. 6, Gongjeon Gongjang)
경공장 소속 장인의 명부는 공조 본조와 소속 관 사에 보관되었으므로, 경공장에만 들어있는 4종 다 회 관련 장인의 명부는 공조, 상의원, 전설사에서 각각 관리했을 것이다. 또, 사천 즉, 개인이 소유한 노비는 공장이 될 수 없었고, 나이 만 60세가 되면 공장의 직역에서 면제됨을 알 수 있다.
장인은 물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제작 품을 수시로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장인은 기본적으로 잡직(雜職)에 들어가는데, 「경 국대전」에 의하면 잡직에 소속된 관원들은 “모두 (1년에) 네 번의 도목이 있다(皆四都目)”(Gyeonggukdaejeon, volume 1, Yijeon Japjik)라고 규정하였 다. 여기서 ‘도목(都目)’은 관원들의 성적을 평가하 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장인들도 1년에 4번의 평 가를 받고, 이를 종합하여 승급 여부를 결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조에 소속된 장인의 근무 형태와 승급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규정된다.
“장인의 수는 공전 에 나온다. 전원을 2반으로 나누어 근무하게 하고, 재직기간 900일이 되면 품 계를 높이되 종6품에서 그치고, 다만 근무일수[元 仕]만 계산한다.”
(Gyeonggukdaejeon, vol.1, Yijeon Japjik:
“匠人數見工典, 分二番, 仕滿九百加階, 從六品而止, 只計元仕.”)
조선시대 장인들은 2교대 근무를 하고, 900일을 근무하면 품계를 높여주었음이 파악된다. 다만 장 인이 오를 수 있는 품급은 종6품까지이고, 그 이상 은 오를 수 없었다.
이렇게 장인들의 품계가 종6품까지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조에서 잡직을 담당하던 관원의 품계는 종6품까지만 규정되었다. 그 중 다회 관련 장인이 있는 부서의 품계와 직급을 보면 <Table 2> 와 같다.
공조 본조에는 종8품의 공조(工造) 1명, 종9품의 공작(工作) 2명이 있다. 또 상의원에는 종7품의 공 제(工製) 4명, 종8품의 공조 1명, 종9품의 공작 3명 이 있다. 그런데 규정에 의하면 상의원의 공제는 능 라장(綾羅匠), 야장(冶匠), 환도장(環刀匠)이 맡을 수 있었고, 공조는 옥장(玉匠), 화장(咊匠), 은장(銀匠) 이 맡을 수 있었으며, 나머지 장인은 공작만 맡을 수 있었다(Gyeonggukdaejeon, volume1, Yijeon Japjik). 따라서 상의원에 소속된 다회 관련 장인은 모두 종 9품 공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사에 소속된 장 인의 품급과 직책 등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조선전기 다회 관련 장 인의 근무 형태, 신분, 직급 등은 아래와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총 4종의 다회 관련 장인은 사천이 아 닌 신분에서 선발하여 1일 2교대로 만 60세까지 근 무하며, 1년에 4번 평가를 받는다. 900일마다 품계 를 높이지만, 공조 본조에서는 종8품 공조와 종9품 공작의 직급까지만 받고, 상의원에서는 종9품 공작 의 직급만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이들 장인 위에는 정2품 공조 판서 1인, 종2품 참판 1인, 정3품 참의 1인, 종5품 정랑 3인, 정6품 좌랑 3인이 있어, 장인 들이 각종 물품을 생산하는 것을 관리하였다.
III.Tools of Dahoejang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국가에서 가례(嘉禮), 책 례(冊禮), 국장(國葬), 존숭(尊崇) 등의 큰 의례가 있 을 때 일의 전말, 소요된 재용(財用)과 인원, 의식 절차, 행사 후의 논상(論賞) 등을 의궤(儀軌)에 기록 하였다. 의궤에서는 때로 각 의례를 거행할 때 소 요된 물품을 제작한 장인에 관한 기록도 찾을 수 있다. 확인 결과, 그 중 총 50종의 의궤에서 다회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도구에 관한 내용이 확인되 었다. 다회장에게 소용되었던 도구는 해사기(解絲 機), 합사기(合絲機), 합선기(合線機), 연사기(練絲機, 鍊絲機), 쌍사기(雙絲機), 다회기(多繪機), 영자판(纓 子板) 등이었다. 이들 도구는 대개 다회장에게 소용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매듭장의 소용 도구로는 해 사기 한 종류만 나타난다.
아래에서는 이들 도구 관련 내용을 각각 분석하 고, 현대 장인들이 사용하는 도구를 참조하여 의궤 에 나타나는 각 도구의 형태와 용도를 유추하도록 한다. 현재는 매듭장이 다회까지 짜므로 조선시대 의 다회장과 매듭장의 제작 물품을 비교하기 위하 여 매듭장의 도구에 관한 기록도 함께 정리하여 비 교, 검토한다. <Table 3>은 다회장의 도구와 제작 물품 등을 의궤의 간행 연도별로 정리한 것이고, <Table 4>는 매듭장의 도구와 제작 물품 등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Haesagee(解絲機, spinning wheel)
해사기는 여러 도구 중 유일하게 다회장과 매듭 장에게 모두 소용된다. 다회장의 도구로는 1713년 「숙종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존숭도감의궤(肅 宗仁敬王后仁顯王后仁元王后尊崇都監儀軌)」부터 1906년 「순종순명황후가례도감의궤(純宗純明皇后嘉 禮都監儀軌)」에 이르기까지 총 21종의 의궤에 나타 난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조선후기 내내 다회장이 다회를 짤 때 해사기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매듭장의 도구로는 1713년의 위 숙종과 숙종비 존숭의궤부터 1752년 「인원왕후 영조정성왕후존숭도감의궤(仁元王后英祖貞聖王后 尊崇都監儀軌)」까지의 5종 의궤에서만 나타난다. 매 듭장이 해사기를 사용한 것은 18세기 전반기로 한 정되는 것이다.
해사기는 다회장의 도구에서 주로 단독으로 기 록되지만, 1755년 「인원왕후숙빈영조정성왕후존숭 도감의궤(仁元王后淑嬪英祖貞聖王后尊崇都監儀軌)」 에서는 합사기와 함께 기록된다. 1755년에 다회장 이 다회를 짤 때 해사기와 합사기를 함께 사용한 것이다. 또 1713년 숙종 등의 존숭의궤부터 1752년 인원왕후 등의 존숭의궤까지 총 5종의 의궤에서는 해사기, 합사기, 영자판이 함께 기록된다. 이를 통 해 18세기 전반기에 다회장은 해사기, 합사기, 영자 판을 모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해사기의 수량은 다회장이 대개 1개만 사용하는 것으로 기록되지만, 1736년 「사도세자책례도감의 궤(思悼世子冊禮都監儀軌)」에서는 2개를 쓰는 것으 로 기록된다. 한편, 매듭장의 해사기는 2개를 쓰는 것으로 기록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다회는 대부분 명 주실(絹絲)로 만들었다.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자 아낼 때는 온탕(溫湯)에 누에를 담가 고치에서 나 오는 실을 물레나 자새(絲車)에 감고, 실이 일정 분 량 감기면 빼내 타래로 만든다. 이 타래는 풀어서 가락이나 얼레에 감는데, 이렇게 실을 풀어내는 과 정을 ‘해사(解絲)’라고 한다.
실타래는 용도에 따라 타래를 걸어두는 기구가 달라질 수 있다. 바느질을 위해 작은 실패에 감을 때는 양 손목이나 발목에 타래를 걸고 실패에 감지 만, 옷감 직조와 같이 많은 양을 풀어야 할 때는 별 도의 기구가 필요하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년)가 저술한 「임원경제지(林園 經濟志)」 전공지(展功志) 권5 ‘방직도보(紡織圖譜)’ 에는 직조에 필요한 각 과정을 여러 문헌을 인용하 여 자세히 서술하고 나서 도보(圖譜)를 그려 넣어 기구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공지에 는 ‘낙거(絡車)’(Fig. 1)가 타래의 실을 푸는데 사용 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낙거는 4개의 막대를 고 정시켜놓고 거기에 실타래를 걸고 얼레에 감는 구 조로 되어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명주짜기가 전 승되고 있는 경북 성주와 경주에서는 돌것에 타래 를 걸고 실을 푸는데, 이는 예로부터 그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해 오던 방법이라고 한다(Fig. 2). 그런 데, 이 돌것은 「임원경제지」의 ‘목면발거(木棉撥車)’ (Fig. 3)와 형태가 유사하다. 목면발거는 자아낸 무 명실을 감는데 사용하는 기구이다. 낙거처럼 타래 를 걸치는 부분은 사각형의 막대를 달지만, 가운데 기둥이 회전되는 구조여서, 타래를 돌려 좀 더 효 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다회장의 전승이 단절된 현재 시점에서 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해사기의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 다. 다만 민간에서 전통적으로 해 오던 생활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경주와 성주에서 사용하는 돌것과 유사한 구조의 해사기 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Hapsagee(合絲機, doubling machine)
합사기는 다회장의 도구로만 나타난다. 기록은 1713년 숙종 등의 존숭의궤부터 1863년 「철종대왕 국장도감의궤」까지 총 21종의 의궤에서 나타난다. 해사기와 마찬가지로 조선후기 내내 다회장의 도 구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합사기는 다회장의 도구로 단독으로 기록되기도 하지만, 위의 해사기 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때로 는 해사기나 영자판과 함께 적혀 있는데, 수량은 모 두 1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76년 「영조국장도 감의궤」부터 1863년 철종의 국장의궤까지에는 합 사기를 만드는 세부 재료가 명시되는데, 이에 의하 면 합사기 1개를 만들 때 바탕(所湯)을 만드는 재료 로 장송판(長松板) 3척(尺), 기둥(柱) 재료로 소소조 리목(小小條里木) 반(半)개가 필요하다. 따라서 합 사기는 바닥에 나무판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 운 형태로 추정할 수 있다.
다회를 짜기 위해서는 원하는 굵기만큼 실을 여 러 올을 합하여 한 올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 사 용하는 기구가 합사기이다. 특히 올이 가는 견사는 여러 올을 합해야 끈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굵기가 나온다. 자수를 놓는 수실과 같이 실의 길 이가 짧을 때는 별다른 기구 없이 실 끝을 못에 걸 어 고정시켜놓고 손으로 비벼 합사를 하지만, 양이 많을 때는 합사기가 필요하다. 합사를 할 때는 여 러 개의 얼레에 감긴 실을 한데 모아 물레에 감아 서 합사를 하며, 합사하는 올수에 따라 2합(二合), 3 합(三合), 4합(四合) 등으로 구분한다.
「임원경제지」 전공지에는 목면선가(木棉線架)에 서 합사하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Fig. 4). 물레와 비슷한 형태로 높이 2척 정도가 되는 기둥 하나를 설치하고, 4개의 가락에서 나오는 실이 걸쳐지도록 한 후, 물레에 놓인 2개의 가락에 2올씩 감으며 합 사하고 있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매듭장들 이 합사를 할 때에는 필요한 다회 길이보다 좀 더 길게(합사를 하면 실 길이가 약간 줄어 듦) 2개의 상사거리를 놓고, 상사거리 위에 달린 못에 원하는 올수만큼 왕복하며 실을 건 후, 한쪽 상사거리의 못에 걸린 실을 빼내어 비톳에 걸고 비톳을 돌리면 서 합사를 한다(Fig. 5).
3.Hapseongee(合線機, plying machine)
합선기는 1713년 숙종 등의 존숭의궤부터 1776 년 영조의 국장의궤까지 총 7종 의궤에 기록된다. 수량은 대부분 2개이지만, 영조 국장의궤에서만 1 개로 나타난다.
합선기는 굵은 선(線)을 만들 때 사용하는 기구 이며, 이 굵은 선은 유소와 같이 큰 매듭장식을 만 들거나 책을 장정할 때 사용한다.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선은 주로 세 가닥을 합한 것을 가장 많이 사 용하였는데, 이것을 각종 의궤에서는 ‘삼갑소(三甲 所)’ 즉 ‘세겹바’로 기록하였고, 현재 매듭 장인들 은 ‘삼선(三線)’으로 부르기도 한다. 국립고궁박물관 에는 어책(御冊), 어보(御寶)의 부속품으로 많은 삼 갑소가 소장되어 있는데, 연구자가 200여점의 유물 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 직경 0.8㎝ 이상의 굵은 끈목이었다(Fig. 6).
유소나 책을 만들 때 쓰는 선은 옷감 직조에 사 용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실을 합하여 굵게 만들므로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 서유구는 「임원 경제지」 전공지에서 물레(紡車)를 오른쪽으로 돌려 무명실을 잣는데 실을 합쳐서 물레를 왼쪽으로 돌 리면 선(線)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물레를 합선기 로도 사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근대 이후 매듭 장인들은 <Fig. 5>의 상사거리와 비톳을 사용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작업을 하나 더 무겁고 고리부분 이 큰 비톳을 사용하고 있다.
4.Yeonsagee(鍊絲機, 練絲機, twisting machine)
연사기는 1681년 「숙종인현후가례도감의궤」부터 1762년 「정조효의왕후가례도감의궤」까지 총 10종 의 의궤에 보인다. 그런데 연사기만 단독으로 나타 난 경우는 없고, 모두 쌍사기와 함께 기록되며 필 요 수량은 1개이다.
섬유 공정에서 연사는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연사(鍊絲)’ 혹은 ‘연사(練絲)’로 표기 되며, 정련을 통해 누에로부터 자아낸 생사(生絲)의 표면에 있는 세리신을 제거하여 부드럽게 만든 실 을 뜻한다. 앞서 제2장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경공장(京工匠)에는 연사장(練絲匠)이 있다. 직조에 필요한 생사를 정련하는 공정을 전문으로 하는 장 인들인데, 정련을 하는 정도에 따라 실의 부드러움 과 강도 등의 특성이 달라지므로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상의 원에 75명의 연사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능 라장(105명) 다음으로 많은 인원이다. 당시 적지 않 은 양의 실을 정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의원 에서 연사장이 작업한 실은 다회 직조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옷감을 짜는데 더 많이 쓰였을 것이 다. 둘째, ‘연사(撚絲)’로 표기되며, 꼬임을 준 실을 뜻한다. 이 실은 용도에 따라 강도를 조절하여 꼬 임을 많이 주기도 하고, 적게 주기도 한다. 다회장 이 사용한 도구인 연사기는 ‘연사기(練絲機)’ 혹은 ‘연사기(鍊絲機)’로 기록되므로, 글자의 뜻으로만 보면 이 도구는 위 두 종류 중 전자(前者)에 해당하 여 실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소용되었던 여러 다회 물품 관련 기록을 보면 다회의 재료에 색사(色絲)가 포 함되는 것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에는 금보(金寶) 제작에 “술(蘇兀)에 들어가는 지금(紙金) 1장, 끈의 속심 홍면사(紅綿 絲) 1냥, 영자용 다회 홍진사(紅眞絲) 2냥”이 소요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회장에게 염색을 마친 면 사와 견사가 제공되는데, 염색 공정을 염두에 두면 연사장이 정련을 마친 실을 염색장이 받아서 염색 을 한 후 다회장에게 공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렇다면 다회장은 이미 정련과 염색의 기본 공정이 끝난 상태의 실을 공급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다 회장에게 소용되는 도구인 연사기는 정련을 하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다회를 짜기 위해 실에 꼬 임을 주는 연사(撚絲)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일 것으 로 추정된다.
유소나 매듭을 맺을 때 쓰는 끈목은 어느 정도의 꼬임이 들어가 있다. 여러 올의 실을 합사할 때 먼 저 각각의 실에 꼬임을 준 후 합사하는 것이다. 예 를 들어, 이합사(二合絲)를 만들려면 먼저 실을 왼 쪽으로 꼰 후, 이 꼬임을 준 실 2올을 합하여 다시 오른쪽으로 꼬임을 준다. 합사한 실은 꼰 방향에 따라 좌사(左絲), 우사(右絲)라 부르기도 한다.
외국의 경우, 실에 꼬임을 줄 때는 물레나 가락 바퀴를 사용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가락바퀴 를 사용하지 않고, 물레만 사용한다. 그리고 다회는 옷감을 짤 때 사용하는 실보다 굵게 합사한 올을 사용하므로 가락바퀴보다는 큰 물레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다회를 짤 때는 대체로 필요한 길이만큼만 실을 꼬므로 합사할 때 실을 꼬는 연사(撚絲)도 함 께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합사에 사용하는 상 사거리와 유사한 도구를 연사기(撚絲機)로 사용했 을 가능성이 있다. 의궤에서도 다회장의 도구 가운 데 합사기와 연사기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 이는 합사기와 연사기가 유사한 도구였고, 합사와 연사를 동시에 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5.Ssangsagee(雙絲機, doubling machine)
쌍사기에 관한 기록은 1667년 「숙종세자책례도 감의궤(肅宗世子冊禮都監儀軌)」부터 1762년 정조의 가례의궤까지 약 100년간 총 15종 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다회장의 도구로 단독으로, 또는 연사기와 함 께 명시되어 있다.
기록이나 그림, 현재 민간에서 사용하는 도구 등 을 모두 종합해도 쌍사기의 형태나 용도를 짐작할 만한 자료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도구의 명칭으로 보아 실 두 가닥을 가지고 어떤 공정을 행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혹은 쌍사기를 사용하여 만 드는 물품이 연(輦), 채여(彩輿), 청개(靑蓋), 회승 (回繩) 등인데, 여기에는 굵은 끈목이 필요하다. 따 라서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하는데 쓴 도구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쌍사기가 1667년부터 1762년까지 나타나 는 것에 비해, 합사기는 1745년부터 1863년까지 나 타나며, 합선기는 1713년부터 1776년까지 나타난 다. 이것으로 보아 쌍사기는 합사기였으며, 합사기 로 불리기 이전의 명칭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6.Dahoegee(多繪機, Cord Machine)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 ‘다회(多繪)’ 용어는 조선 전기의 국가전례서인 「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 禮儀)」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다회 실물은 삼국시 대 유적지인 천마총, 무령왕릉 등에서 출토되어, 우 리나라에서 고대부터 이미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회를 짤 때 가장 중요한 도구는 ‘다회기’이다. 그런데, 본 연구를 위해 700여종 이상의 문헌을 모 두 조사한 결과, 다회기의 기록은 3건만 찾을 수 있 었다. 가장 이른 것은 1605년에 편찬된 「호성선무 원종삼공신도감의궤(扈聖宣武原從三功臣都監儀軌)」 이고, 이어 1644년의 「영국녹훈도감의궤(寧國錄勳 都監儀軌)」(1644), 마지막으로 1729년의 「분무녹훈 도감의궤(奮武錄勳都監儀軌)」(1729)이다. 다회기의 수 량은 1개이다.
다회기는 의궤에 재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도 전혀 없으나, 유물 과 그림자료를 통해 그 실제 모습을 파악할 수 있 음이 확인되었다.
다회기 유물은 현재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과 이 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조선후기 궁중에서 상궁이 사용하던 다회기가 소장되어 있다. 2점 모두 나무 로 만든 발우(拔羽)의 형태에 입술부분에 홈이 파 여 있으며,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의 다회기(Fig. 7) 에는 8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의 다회기에는 16 사가 걸려 있다.(National Museum of Korea, 2004)
다회기를 묘사한 그림은 근대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가 있다. <주머니선치며 ‘듸’치는 모양>이라는 풍속화(Fig. 8)에는 두 명의 남자가 다 회를 치고 있는데, 왼쪽 인물은 8사 동다회(童多繪) 를 치고 있으며, 오른쪽 인물은 2대가 함께 작동되 는 반자동식 직기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왼쪽 인 물이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형태인 남원 8사틀(Fig. 9)이 현전하고 있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Park and Choi(2013)의 연구에서는 현재 다회 기 능 보유자들이 사용하는 다회기에 대해 조사를 하 였는데, 끈목이 동그란 동다회의 경우 남원 8사틀 과 구조가 비슷한 둥근 형태의 판 위에서 직조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7.Youngjapan(纓子板)
영자판은 1713년 숙종 등의 존숭의궤부터 1752 년 영조 등의 존숭의궤까지 총 4종의 의궤에 기록 된다. 영자판은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고, 해 사기, 합사기와 함께 나타난다. 세부재료는 기록되지않는다.
영자(纓子)는 조선시대의 관모류를 비롯한 각종 복식에 쓰이고, 이 외 어보(御寶), 함(函) 등 다양한 물품에 쓰이는 끈목이다. 영자판도 옥보(玉寶, 「숙 종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존숭도감의궤」), 시옥 인(諡玉印, 「단의빈예장도감의궤」), 시보(諡寶, 「숙 종국장도감도청의궤」) 등의 물품을 만드는 재료로 기록되어 있어, 주로 어보의 인끈(鈕)에 매는 끈을 제작하기 위한 도구임을 알 수 있다(Table 3). 그런 데 현재 남아있는 어보의 인끈은 대개 굵은 동다회 이고, 동다회의 몸체인 끈목을 짤 때 특별하게 고 안된 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다회의 도구로 영자판이 기록되고 있어, 이 영자판은 동다회가 아닌 다른 물품을 제작하는 도 구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끈에 쓰는 동다회는 끝부분에 방울술이 달려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울술은 방울모양의 둥근 부분은 세밀하게 망(網)으로 엮고, 그 아래는 술을 늘어뜨린다. 의궤에 기록된 영자판은 바로 이 술을 제작하는 도구로 여겨진다(Fig. 10). 이것은 다회장이 동다회를 만드는 공정과 방울술을 만드 는 공정을 모두 담당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 로 매듭장이 방울술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현재의 일반적인 인식과 다른 사실이다. 또한 중요무형문 화재 제22호 매듭장으로 지정되어 있는 정봉섭 보 유자의 증언에 의하면, 부친이자 최초 매듭장이었 던 정연수 전 보유자가 다회만 짜던 장인으로부터 다회를 공급 받고 본인은 매듭만 지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는 다회를 짜는 것과 매듭을 엮는 것은 완전히 구분되어 있었으며, 술 장식이 필요한 경우 다회장이 제작하여 매듭장에 게 공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술을 만들 때는 먼저 왼쪽으로 실을 꼬고, 이어 왼쪽으로 꼰 실 2가닥을 합하여 오른쪽으로 비빈 후(실에 꼬임을 주는 과정을 ‘비빈다’라고 표현함), 판에 박아놓은 못에 길이를 맞춰 팽팽히 걸고, 뜨 거운 수증기로 김을 올려 길이와 형태를 고정한다. 현재 이 판을 ‘술판’(Fig. 11)이라고 하는데, 영자판 도 이와 유사한 구조의 도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IV.Conclusion
조선시대의 다회장은 각종 끈목을 짜던 장인들 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경국대전」을 통해 다회 관 련 장인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확인하였고, 조선 후기 의궤의 기록을 통해 다회장에게 소용되었던 도구의 명칭과 재료를 확인한 후, 현재 사용되고 있는 도구와의 비교를 통해 그 형태와 사용법 등을 유추하였으며, 세부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전기 다회장은 외공장에는 없이 경공장에만 소속되어 있었다. 다회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장 인은 다회장, 매듭장, 합사장, 연사장의 4종이 있었 고, 이들은 공조 본조와 상의원, 전설사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총 인원은 103명이었다. 그 가운데 다회 장은 12명인데, 공조 본조에 2명, 상의원에 4명, 전 설사에 6명이 배치되었다. 또 매듭장은 총 6명으로공조 본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이 있었다.
조선시대 공장은 기본적으로 사천(私賤)이 아닌 신분에서 선발되므로, 개인 노비는 공장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은 1일 2교대로 만 60세까지 근무하며, 그들의 업무는 1년에 4번 평가를 받았다. 업무평가 는 주로 제작품의 품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렇게 평가를 해서 900일마다 품계를 높였다. 다만 장인들은 종6품까지만 올라가고,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으며, 특히 다회 관련 장인들은 공조 본조 에서는 종8품 공조(工造)와 종9품 공작(工作)의 직 급을 받고, 상의원에서는 종9품 공작의 직급만 받 을 수 있었다.
다회장이 사용한 도구는 총 50종의 의궤에서 해 사기(解絲機), 합사기(合絲機), 합선기(合線機), 연사 기(練絲機; 鍊絲機), 쌍사기(雙絲機), 다회기(多繪機), 영자판(纓子板) 등 총 7종을 확인하였다. 이 중 해사 기는 다회장뿐만 아니라, 매듭장에게도 소용되는 도 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따라서 의궤에 매듭장의 도구로는 해사기 한 종류만 확인되었다. 매듭장이 다회를 짜는 작업은 하지 않고 대신 다회장이 완성 한 다회를 가지고 엮는 작업만 담당했기 때문에 별 도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사기는 타래로 감긴 실을 푸는 도구로 조선시 대 해사기는 현재 경상북도 성주와 경주에서 타래 의 실을 풀 때 쓰는 도구인 ‘돌것’과 유사한 구조일 것으로 여겨진다. 합사기는 현재 매듭장들이 합사 를 할 때 상사거리와 비톳을 함께 쓰는데, 조선시 대에도 이러한 도구를 썼을 가능성이 있고, 또 서 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제시되어 있는 ‘목면선가 (木棉線架)’와 유사한 형태일 가능성도 있다. 합선 기는 합사기와 마찬가지로 상사거리와 비톳을 쓰 지만, 굵은 선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더 무겁고 고리가 큰 비톳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 사기는 합사기의 일종으로 보이며, 쌍사기는 형태 나 사용법 등에 관해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으 나, 합사기라고 불리기 이전의 명칭이었을 가능성 도 있다. 다회기는 동다회를 칠 때 사용하는 유물 과 그림자료가 남아있어 구체적인 형태 파악이 가 능한데, 주로 둥근 형태의 판이나 용기와 같은 모 양의 물건에 실을 걸어놓고 짠다. 영자판은 술을 만드는 판으로 볼 수 있어서, 이를 통해 다회장이 술까지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다회장은 끈목 을 비롯하여 술까지 제작하였던 반면, 매듭장을 주 어진 끈목으로 매듭만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다회장이 소속되었던 기관과 그들이 사용했던 도구, 제작 물품 등에 관 해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근간 다회에 대한 연구 가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본 연구를 계기로 현대에 들어 전승이 단절된 ‘다회장’이 재 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